양윤석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양적완화라는 돈 풀기 정책을 펴면서 고통을 받고 있던 가계나 기업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유럽의 집값이 폭등하고 주식은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한국에서는 ‘나보다 아파트가 돈을 더 잘 번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 지고 있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이 자산 버블을 일으키면서 빈부격차를 더 고착화시켰다.

왜 그럴까? 토마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부유층일수록 일해서 버는 돈(노동소득)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의 증가율이 훨씬 크기 때문에 불평등이 커진다는 것이다.

사실 인류는 인간에 대한 불평등을 이런 방식으로 심화시켜 왔는데 18세기 사상가 장자크 루소(Rousseau)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류 문명의 폭력성을 환기시켰다. 남들보다 더 존경받고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있어 사적 재산이 탄생했고 선점한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규칙(법률과 제도)을 만들면서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이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유럽 문명이 아프리카보다 더 발전된 건 사실이다.

백인이 생물학적 우월성이 있어서일까? 절대 아니다. 단지 그들이 운 좋게도 유럽에 살고 있었고 문명 발전에 보다 좋은 환경을 가졌을 뿐이라고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인간사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운 좋게 좋은 환경을 만났을 뿐이다.

삶을 잘 살고 있을까 하는 기준은 처음에는 동년배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각자의 삶에 들어서게 되면 누가 먼저 취직을 했고 집을 마련했으며 승진을 먼저 했다는 것 등은 관심의 대상이 안된다.

인생은 나쁜 일이라 생각했던 것도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어떤 것을 빨리 성취하면 다른 것은 늦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취의 사다리가 끊어졌을 땐 상황이 다르다.

불평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토마스 피케티의 말을 빌리면 학벌 엘리트와 자산 엘리트, 즉 좌우 엘리트의 합작이며 불평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의로 시작한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불평등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피케티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다.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18세기 루소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21세기 피케티 처방처럼 기본 자산을 지급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니체의 '아모르파티'처럼 끊어진 성취의 사다리를 복구하고 차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적극성이 더 필요하다.

그런 정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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