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대전의 원자력 시대(上)
이승만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 설치
원자로 기공식 참석 등 열의 보여
박정희 대통령도 원자력 '야망' 커
1979년 연구소 대덕연구단지로 이전
해외나간 과학자 귀국시켜 인력수혈
“우라늄 농축 불소 전공과학자 필요”
장인순 박사, 귀국요청 받은뒤 응해
美 눈치보던 전두환 정권에 수모…
한필순 사단 중심 돼 연구 불 지펴

▲ 원자력 대전시대를 이끈 두 주역, 한필순 박사와 장인순 박사.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해외 과학자 유치 1호 인물들이다.
▲ 원자력 대전시대를 이끈 두 주역, 한필순 박사와 장인순 박사.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해외 과학자 유치 1호 인물들이다.
▲ 원자력 대전시대를 이끈 두 주역, 한필순 박사와 장인순 박사.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해외 과학자 유치 1호 인물들이다.
▲ 원자력 대전시대를 이끈 두 주역, 한필순 박사와 장인순 박사.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해외 과학자 유치 1호 인물들이다.
▲ 원자력 연구소 현판식. 대전시 제공

우리나라에 최초로 원자력의 씨를 심은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1956년 미국 전력협회 시슬러(Cisler)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이차대전후 파괴된 유럽의 전기 시스템을 복구하는 책임자였다.

시슬러 회장은 원자력이 석탄의 300만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대통령은 이 말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심각한 에너지 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즉시 그해에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케 했는데 그때는 과학기술부가 없었던 것.

이어 1958년 10월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원자력 연구소 간판을 달았으니 이것이 대한민국에 처음 원자력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듬 해, 그러니까 1959년 7월14일 국내 최초의 열출력 100㎾ 원자로 기공식을 갖게 하고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첫 삽을 떴다.

이렇게 집념을 갖고 원자력을 추진하던 이 대통령은 4·19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원자로 역시 우여곡절 끝에 1962년 3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준공될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의 원자력 기술을 갖게 된 첫 걸음은 이렇게 미약하게 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원자력에 대한 야망은 원대했다. 에너지 뿐 아니라 미국으로 부터 핵개발에 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설이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그 당시 베트남의 공산화와 주한미국의 감축설 등으로 박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79년 박 대통령은 원자력 연구소를 지금 대덕연구단지로 내려 보냈고 연구소 이름을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라고 했으며 직원은 300명 규모, 원자력 연구소로 이름을 찾은 것은 이듬해였다.

이것이 '원자력의 大田時代' 막을 연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원자력 씨앗을 심은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원자력의 '대전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나 실력과 경험이 풍부한 기술 인력이 아쉬웠다. 박 대통령은 대덕연구단지내 다른 연구원 기술인력 보강을 위해 그러했듯이 미국 등 해외에 있는 우리 과학자들을 귀국 시키는데 열심이었다. 그래서 제1호로 귀국대열에 합류한 과학자들로 한필순 박사, 장인순 박사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한번은 정부에서 해외 과학자 100명을 초청 '과학입국'의 미래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장인순 박사는 '원자력의 우라늄 농축을 위해 불소 전공과학자가 필요하다는 귀국 요청을 받고 기꺼이 도장을 찍었다. 장 박사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원 생활을 했는데 불소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두 번이나 피부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창 연구소가 활기를 띨 무렵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연구소는 중심을 잃고 한 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원자력의 이름 사용을 금지시키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을 바꾸는 수모까지 겪었다.

전두환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게 좌절의 시기에 한필순 박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연구원들을 다독이고 설득하며 우리나라가 '원자력기술의 식민지'에서 독립하지 않고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한필순 사단'이 중심이 되어 원자력연구에 불을 붙였다. (계속)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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