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언어 세심히 조명한 신작…"영감은 체력에서 나오죠"

▲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최근 산문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발간한 작사가 김이나가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6.10 jin90@yna.co.kr (끝)
▲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최근 산문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발간한 작사가 김이나가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6.10 jin90@yna.co.kr (끝)
▲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최근 산문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발간한 작사가 김이나가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6.10 jin90@yna.co.kr (끝)
▲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최근 산문집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발간한 작사가 김이나가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6.10 jin90@yna.co.kr (끝)

"사전을 보는 연습을 항상 해요. 연습이라기보다 그냥 옆에 둬요. 가끔 뭐가 안 떠오를 때 보다 보면 '아, 이 단어도 있었지' 하게 되죠."

가인이 피처링한 아이유의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듣다 보면 "끔찍한 파문이 일지 몰라"하는 대목이 나온다. 뜻밖에 등장하는 문어체 단어 '파문'이 묘한 힘을 발휘한다. 노랫말을 쓴 작사가 김이나(41)는 "가사를 쓰게 되면 사랑, 그리움, 이별, 아픔 등 비슷비슷한 단어 풀에서 놀게 되는데 '파문' 같은 단어는 헤드라인에서 보이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그가 최근 펴낸 책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에선 스타 작사가 김이나의 언어 세계가 관성을 비껴가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옷이 많아도 맨날 입는 걸 입는 것과 똑같이 언어도 거듭해서 쓰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성에가 끼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의 속뜻을 세심하게 탐문하고 그 쓰임새를 되묻는다.

이를테면 '유난스럽다'는 말에서는 특별하다는 뜻을 길어 올리고, '포장'은 겉치레가 아닌 '주는 이의 마음이 담긴 그 무엇'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에 낀 '성에'를 닦아내는 셈이다.

최근 마포구 상암동에서 만난 김이나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고,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말들도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 속으로 오는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

단어의 미세한 질감을 판별하는 데서도 작사가 특유의 감각이 읽힌다. '찬란하다'를 발음할 때 "퍼져나가는 빛이 혀에서 구현되는" 느낌을 포착하고, '슬프다'와 '서럽다', '서글프다'의 다른 결을 짚어내는 식이다.

"조용필 '모나리자'의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나'를 들으면 '정녕'이라는 말에서 오는 힘이 있잖아요. '진정'과는 다르고, '진짜'도 아니고, '정녕'이어야만 하는 비장함과 결기가 있죠."

그는 "어릴 때부터 소리로서의 단어, 그리고 글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도 놀이처럼 단어를 발음했고 구연동화 테이프를 들으면서 흥미를 느꼈다는 그는 "요새도 읽을 때 소곤소곤하게 소리를 내는 편"이라며 웃었다.

김이나가 들려주는 언어 이야기에는 그의 삶의 궤적도 담겨 있다.

그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유학 생활이 아니었으면 소수자로서의 시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재벌', '갑질', '애교' 같은 단어가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맥락을 이방인의 눈이 돼 읽어내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모바일 콘텐츠 회사, 엔터테인먼트 업체 등 다양한 직장을 거쳤다. 작사가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다 2009∼2010년께 작사가로 전업했다.

아이유의 '좋은 날'과 '잔소리', '너랑 나',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 조용필의 '걷고 싶다' 등 숱한 히트곡 가사를 썼다.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그가 직업인으로서 조명하는 것은 오히려 '살아남기'를 위한 시간이다. 그는 "슬럼프가 찾아올 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고 책에 썼다.

영감을 어디서 받느냐는 질문들에도 "영감은 체력에서 온다"고 간명한 조언을 한다. 그의 4∼5년 전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김이나는 "20, 30대에는 영감이라는 것도 필요가 없었다. 가사가 그냥 줄줄 나왔으니까. 근데 어느 순간 안 써져서 '이제 감이 떨어졌구나' 했는데 그때 인생 최저 체중을 찍었다. 진단을 받아보니 수면장애와 불안장애 등 정신적으로도 여러 가지 증상을 앓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잘 먹고 체중을 원래 상태로 올리고 운동을 했어요. '살려고' 한 일이죠. 건강이 나아지다 보니 다시 글 쓰는 게 재밌는 거예요.…'(건강하면) 글이 나오고 안 나오고가 달라, 글의 질이 달라'라고 하면 후배들도 경각심을 가져요."

이제 40대에 접어든 그의 노랫말에는 나이와 함께 익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그런 가사를 묻자 최근 쓴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를 꼽았다. "이 세상은 우리를 두고 오랜 장난을 했고 우린 속지 않은 거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인생의 역경에 너무 절어 들거나 타협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영롱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곤 한데, 임영웅에게서 그런 부분을 느꼈다고 김이나는 전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사로 항상 꼽는 게 이문세의 '옛사랑'인데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라는 표현이 나와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떤 한정적인 시각으로 뭔가를 보잖아요. 사랑이란 항상 뜨겁고 설레는 것, 늘 필요한 것이라고만 바라보죠. 그게 지겨울 수가 있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보는 거고, 바로 인생 내공에서 나오는 시선이 아닌가 해요."

김이나는 최근 '별이 빛나는 밤에' 새 DJ로 발탁되고, '팬텀싱어3'·'하트시그널 시즌3' 등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의 내 환경이 내 '디폴트'가 아니라는걸 계속 상기시키려고 한다"는 그에게는 여전히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작사가 면모가 더 강해 보였다. '나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스스로에게 계속 심어주기 위해 작업실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작사가의 역할에서도 1인예술이 아니라 가수, 제작자의 협업을 강조한다. 그는 "작사가를 꿈꾸는 많은 사람이 너무 내적 예술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것부터가 너무 틀린 지점"이라며 "한 사람의 내면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만은 아니다. 보통의 일들과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kimhyo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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