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1990년대 100만 명대에 달했던 출생아 수가 2020년 올해 20만 명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 된다.

2030 절반 이상이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고 비혼 결심도 늘고 있다. 진짜 문제는 비혼이 아니다. '사랑'이 문제다.

불꽃 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다짐까지 하지만 이는 착각이 된다. 낭만적 사랑이 주류였던 과거 시대의 이야기가 돼 버린 것이다. 그 많던 사랑이 자취를 감춰 희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타자에 대한 매력의 실종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전제 조건은 나와 다른 것(Difference)에 대한 이끌림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보자. 나와 타자가 별 차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노래를 부르며, 같이 환호 한다. SNS에서도 '좋아요'를 눌러주는 친구들과 교류하며 동질성에 환호를 보낸다. 한마디로 동질성의 과잉이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생’이라는 노랫말도 있다. 그 놈이 그 놈 같다.

당연히 매력을 느끼기 어렵고 사랑은 한 순간의 스냅샷 같은 허상이 된다. 사랑에 모든 걸 다 거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전체영상을 돌려보는 들뢰즈적 사고를 해보자. 시시때때로 보이는 미묘한 차이에 흥분되고 흥분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해질 것이다.

그 때의 사랑도 있지만 내일의 사랑도 만난다. 결국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인내심을 갖고 전체영상을 돌려 보는 사람만이 가지는 능력이 되고 있다.

최근 정의연 사태를 보면서 한국이 아직도 계몽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 진다. 뜻(이데아)이 좋으니 사소한 실수(허상)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소리도 들린다. 참으로 안타깝다. 들뢰즈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허상이 30년간 쌓이면 그것이 실체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차원이 다른, 이해 할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의연은 정신대 속으로 들어갔어야 한다. 그 놈이 그 놈인 세상에서 사랑이 실종된 것처럼, 정의연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었다. 전체영상이 아닌 스냅샷 몇 장을 찍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의연 사태는 최근 필자가 들은 가장 씁쓸한 소식이다. 한국사회의 철학적 수준을 가늠케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를 슬기롭게 대처했듯 정의연 사태도 한국 사회 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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