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남대 본관 여름사진. 청남대 제공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78 청남대, 대통령 별장]
전두환, 학원안정법 반발 거세자
'별장' 청남대 머물며 방안 모색
국회 원내총무 이종찬 교체 지시
야당·대학가 심한 반발 불러와
부정부패 청산 위한 금융실명제
김영삼, 여름휴가 때 청남대서 구상
2003년 충북도에 소유권 이양
대통령 별장 기능 사라졌지만
역대 대통령 특징살린 동상 조성

전두환은 1981년 대통령 취임 후 강압통치를 계속 밀고 나갔다.

그러나 1985년이 되면서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그 첫 케이스가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이 2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 이와 동시에 5월23일에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 지지를 철회하라며 대학생들이 서울의 미문화원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밖에도 학생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서울을 비롯, 대전 등 주요도시에서 경찰과 심각한 충돌이 벌어 졌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 장세동 부장에게 '학원안정법'이라는 것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학원 안정에 역행하는 학생들을 강제로 수용하여 훈련을 시키고 교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삼청교육대를 연상 시키는 악법이었다.

즉각 반발이 일어났고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병영(兵營) 국가를 만드는 악법이라며 취소하라고 요구 했다. 미국도 여러 차례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당시 민정당 총재는 전두환, 당 대표는 노태우, 그리고 국회 원내총무는 이종찬이었는데 이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는 것에 원내총무가 소극적 이었다.

이렇게 학원안정법 제정에 주위의 반응이 좋지 않자, 전두환은 7월30일 청남대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청남대는 대청호를 끼고 있는 55만평의 대통령 별장으로 1983년 자신의 지시로 착공, 그해 12월에 완공을 본 것 인데, 그 후에도 여러 대통령들이 곧잘 이곳에 와서 국정구상을 하는 바람에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마침내 전두환은 7월31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를 청남대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한 정국현안에 대하여 말했다. 학원안정법은 반드시 밀고 나가겠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 국회 원내총무 이종찬을 교체하라는 것이었다.

매우 살벌한 분위기였다. 노태우 대표는 서울로 돌아와 이종찬 원내총무를 불러 이와 같은 뜻을 전하고 교체를 통보했다.

그러자 정국이 발칵 뒤집혔고 야당과 대학가의 반발은 더욱 강렬해졌다.

전두환의 '청남대 구상'은 오히려 정국에 불을 지른 것이 되어 결국 없던 일로 끝나고 말았다.

'청남대 구상'의 결정판은 김영삼 대통령의 이른바 '금융실명제'와 '역사 바로 세우기'.

금융실명제는 역대 정권이 모두 시도했었고 특히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제도라는 것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고 특히 1982년의 장영자 부부 어음사건은 그와 같은 당위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일본도 금융실명제를 시도하다 못했고, 고도의 전산시스템이 뒷받침 돼야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청남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이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극비리에 준비 작업을 지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8월12일 20시를 기하여 '대통령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검은 돈' 차단을 위한 금융거래제가 역사적 출발을 하게 됐으며 우리나라의 전산시스템 역시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역대 다섯 명의 대통령이 청남대에서 휴식을 취하며 소위 '청남대 구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많이 남겼다.

지금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충북도에 소유권을 이양하여 대통령 별장으로서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그 발자취들은 소중히 관리 보존되고 있어 여전히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들의 특징을 살린 동상을 조성해 놓고 주변 경관도 수려하여 충북의 독창적인 테마 관광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충북도는 역사흔적지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추진하고 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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