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확천금 노린 전과자 소행… 현충사 보강사업 계기로
상태바
일확천금 노린 전과자 소행… 현충사 보강사업 계기로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5월 14일 17시 4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5월 15일 금요일
  • 9면
  • 지면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7 '난중일기'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0일 현충사 침입
8권 훔쳐 부산 도주… 국민 충격
박정희 대통령, 수사 더디자 ‘통첩’
부산 경찰국장 제보 입수… 검거
주범 1년 전 통도사서도 문화재 훔쳐
박대통령 특별지시… 16만평으로 확대
목조건물, 콘크리트 철근으로 교체도
▲ 현충사. 문화재청 제공
▲ 이충무공 영정. 문화재청 제공
▲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문화재청 제공

부산에서 일본과의 문화재 밀거래를 하던 유모씨 등 일당 3명은 아산 현충사에 보관중인 국보 78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를 훔쳐 일본에 건너가 팔기로 모의를 했다. 일확천금을 노린 것이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기간 중 직접 겪은 전황과 당시의 정세를 세밀하게 기록한 그야말로 국보 중의 국보.

이들은 범행 일자를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느라 치안에 느슨한 연말을 택하고 현장 답사도 했다. 1967년 12월 30일. 이들 일당은 그날 저녁 현충사 뒷산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밤이 깊어가길 기다렸다. 몹시 추운 밤이었다.

이윽고 자정 무렵, 준비한 공구로 난중일기가 보관된 전시관 문을 부수고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모두 8권의 난중일기를 손에 넣자 현충사를 급히 빠져나와 부산으로 달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크게 당황했으며 국민들 역시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어 1968년 1월 5일. 경찰은 공항과 항구를 철저히 봉쇄하는 한편 전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찾기에 나섰다. 그래도 진척이 없자 박정희 대통령이 1월 8일 직접 나서 수사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자수를 하면 선처하겠다는 담화도 발표했다. 그러는 한편 박대통령은 10일 안에 범인을 잡으라는 통첩을 경찰에 내렸는데 이처럼 대통령이 시한을 정해 범인검거를 지시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난중일기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화재였으며 박대통령이 끔찍하게 여기던 터라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

그러던 1월 17일, 박대통령이 지시한 범인 검거 시한을 하루 앞두고 부산시 경찰국 정석모(전 충남지사·내무장관) 국장실에 제보가 날아들었다.

부산 시민 박모씨가 다방에 들렀다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본 밀항이니, 문화재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수상히 여겨 신고를 한 것이다.

과연 경찰이 급습하여 두 명을 검거했고 급행버스를 타고 도망가려던 주범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난중일기는 범인 중 한 사람의 집 연탄창고에서 찾아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잡고 보니 주범 유모씨는 1년전 통도사에서 문화재를 훔쳐 모 재벌에게 판 혐의로 9개월의 실형을 산 전과자였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난중일기 도난 사건은 18일 만에 해결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현충사는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된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즉 성역화사업이 벌어진 것.

원래 현충사는 1706년 충청도 유림들이 상소하여 이루어 진 것이고 숙종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사액을 내림으로써 역사성과 정통성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 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 일제 하에서의 핍박, 심지어 경매에 넘어갈 위기까지 겪으면서 1932년에는 충무공유적보존회와 한 언론사가 주축이 되어 성금을 모아 중건을 했다. 이곳에는 충무공 묘소와 충무공이 과거급제하여 출가하기까지 살던 집, 그리고 활 쏘며 무술을 단련하던 곳, 어머니를 모시다 왜군에 전사한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500년 된 은행나무 등이 있다. 충무공의 체취가 짙게 배어있는 성지라 하겠다.

이런 현충사를 박대통령 특별지시에 의해 16만평으로 크게 확대했다. 목조건물을 견고하게 콘크리트 철근으로 교체하는가 하면 대규모 연못과 정원을 조성했다. 특히 '현충사' 현판을 박대통령 글씨로 교체했으며 자신이 금송을 직접 심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이 박대통령 사후에 시비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정원이 일본식이고 금송도 우리 전통 정원에 맞지 않으며 현판도 원래대로 두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비를 떠나 현충사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성지로 보존돼야 할 것이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