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중구 무수동 유회당 입구.
▲ 고혜정 명예기자
▲ 고혜정 명예기자

이태원발 코로나19 사태로 아이들 봄방학이 더 길어졌다. 오랜 집콕 생활과 빡빡한 온라인 수업에 지친 아이들과 대전의 효문화유산을 찾아보면 어떨까.

대덕구 미호동에는 차윤주·차윤도 형제 정려각이 있다. 조선 정조 때 회덕 미호리에서 태어난 형제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라 이들이 사는 동네를 효동(孝洞)이라 불렀다. 동생 차윤도는 모친이 몸져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정성껏 달여 올렸고 형 차윤주는 20리길의 어버이 묘소를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하며 소리내 슬피 울었다.

동구 대성동에는 은어송 이야기가 전해온다. 본디 머슴살이를 하던 은어송은 날마다 식장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고 우연히 친해진 고산사 범흥스님과 3년간 점심을 나눠먹었다. 범흥스님은 고마운 마음에 묫자리를 잡아주었고 효성이 지극했던 은어송은 부친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돌아오는 길에 소도둑이 버리고 간 소 한 마리를 얻었고 그날 밤에는 역적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여인이 찾아와 함께 살게 됐다. 또 여인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역적으로 몰린 장인의 억울함도 풀어주었다.

서구 갈마동에는 신유천 효자 전설이 전해온다. 신유천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지혜가 뛰어나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 또한 효행이 지극하여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신효자(愼孝子)라 불리기도 했다. 1761년(영조37), 1788년(정조12), 1817년(순조17) 등 세 차례 이상 효자정려를 청원하는 상소문이 올라 순조 때 효자정려가 세워졌다.

유성구 전민동에는 임하근 정려가 남아있다. 목수인 임하근은 충북 옥천에서 100여 일 동안 일하면서도 매일 저녁 70여 리 길을 걸어 양친의 밥상을 차려놓고 돌아갔다. 그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호랑이가 감복하여 밤길을 호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낚시질 해 산 물고기로 상식을 올렸고 향나무 관에 벌레가 생기자 새로 관을 쓸 만큼 효성이 지극했다.

중구 무수동에는 유회당이 있다. 유회(有懷)란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심을 늘 품고 싶다"는 뜻으로 권이진 선생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호와 집 이름을 모두 유회당이라 짓고 후손들에게 효심을 갖도록 했다. 고혜정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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