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한자어로부터 유래했다고는 하지만 무늬란 말은 매력 있는 아름다운 단어이다.

단순하면서 쉽고 발음도 편안하다. 빗살무늬, 물방울무늬, 격자무늬 등은 물건의 거죽에 나타난 어떤 모양으로 해석되지만 꽁무니와 터무니로 이어지면 뜻이 살짝 달라진다.

꽁무니는 꼬리의 무늬로 몸의 뒷부분을 의미해 뒤꽁무니, 맨꽁무니, 꽁무니 빼다 할 때 쓰인다. 터무니없다는 터에 무늬가 없다는 뜻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할 때 사용된다. 모양과 형태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출발했지만 무늬는 터무니에 이르면 흔적이라는 말과 견주 된다.

인간이 점유하는 모든 공간에는 흔적이 남고 그 흔적은 의미를 만든다.

지나간 뒤에 남는 자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장소에 상징을 부여한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인간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아예 의미 부여를 함께 시작했다.

오백년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풍수지리가 동원되고 묏자리를 잡느라 지관을 부른다. 마을을 정하면서도 형국이 부족하면 모자란 것을 도와서 채우는 비보(裨補)라는 이름으로 가짜 산인 가산(假山)을 쌓았고, 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가사의 첫대목은 대부분 영험한 산의 정기를 이어받았다는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물리적 환경을 만들기 이전에 상징적 체계를 우선했다고 한다.

공간에 의미를 입히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건만 모더니즘 시대가 등장하면서 대표적 상징기제인 장식이 죄악으로 취급되었고 공간에 상징을 부여하는 일은 미신적인 속성이라고 치부되었다.

개발과 성장 시대 공간은 이득 창출을 위한 재화이자 수단으로 취급되면서 많은 의미 있는 공간들이 망가졌다.

지역 내 사랑받던 공간이 주목을 받게 되면 건물주는 보존을 위한 제도가 찾아지기도 전에 갑작스레 철거를 감행하고, 사업의 걸림돌로 작용하면 강제로 뜯어 옮겨 낯선 공간에서 초라히 버티게 만들었다.

사람도 떠나가 봐야 빈자리가 더욱 그립고 소중한 걸 깨닫듯이 아끼는 건물과 장소도 사라져 봐야 그 가치를 새삼 실감한다.

그렇게 많은 의미 있는 건물들이 부동산 광풍 속에서 사라졌고 사라지려 하고 있다.

넓디넓던 대전역 광장도 효율 논리 속에 쪼그라들었고 철도관사촌도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대전역 쪽방촌도 공공임대주택을 중심으로 개발될 것이라고 하는데 안 좋은 이미지에 밀려 좁은 골목으로서의 독보적인 가치와 건물 앞 화분을 늘어놓던 정취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하숙집 골목길,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자주 다니던 노포를 나 홀로 지켜내기에는 크게 버겁다.

한 가지 숙고할 사실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무조건 원형대로 보존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의외로 많다. 그대로 되살리고 싶어도 원래의 구조로는 불가능하다든지 현재의 쓰임새로는 불합리한 용도라든지….

19세기 활동한 건축가 비올레르뒼(Viollet-le-Duc)은 고전 건축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정리한 업적으로 유명한데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복원하면서 당시 새로운 재료인 철골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렇다고 해서 돌로 만들어진 본 건물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지금 남아있는 돌들이 전부 중세의 것은 아니다. 닳아지면 갈아 끼우기를 반복해도 앞으로 몇 만 년이 흘러도 남아 있으리란 사실이 중요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가치라는 얘기다. 대전과 같이 근대에 만들어진 도시라고 해도 그 시대의 가치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면 정통성은 충분하다.

십여 년 전 뉴타운 열기 속에 계획했던 사업들이 도시공간 곳곳에서 개발이란 이름으로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혀놓은 흔적과 얘기가 곳곳에 배어 있을 것이다. 점차 이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니 다행이다.

터 무늬 없이 밀어버리는 우는 범하지 않기를 고대해본다. 보전한다고 어설프게 옮기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가치를 덧입혀 정통성을 갖게끔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터무니없이 사라지게 할 것이 아니라 터무니 있게 남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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