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강동대학교 사회복지행정과 교수

흰 구름이 흘러간다. 평야지대가 사방으로 펼쳐진 가운데 삼년산성이 해발 325m의 오정산 허리를 감고 솟아 있다. 산성 아래 평야지대인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동풍의 마파람, 북동풍의 높새바람, 서풍의 하늬바람이, 세월 따라 불어오다가 천년의 역사 앞 삼년산성에 머문다.

이 산성은 신라시대의 성으로 우리나라 대표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에 구축했고, 소지왕 8년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해 개축했다. 완공까지 3년이 걸려 삼년산성으로 부르게 됐으며 그 외 축성 역사나 과정들이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지역은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교통과 전략적 요지로 백제와 신라가 서로 차지 하려고 다투던 분쟁지역이었다. 신라는 상주의 사발성을 점령하고 보은으로 진출해 백제의 남진 진출에 대비해 이 산성을 쌓았다. 이때는 백제가 한강유역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었다. 이후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에 쫓겨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천도 했으며 이에 이 산성은 서쪽에 위치한 백제와 북쪽에서 남진 정책을 펼치는 고구려를 대비하면서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서문에서 동쪽 성벽으로 오르니, 앞으로 넓게 펴진 평야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고, 주위에 많은 억새꽃이 바람 따라 흔들이며, 추억처럼 삼년산성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삼년산성에서 직선거리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백제의 동쪽 끝 성인 한민산성이 있다. 그 사이에 넓은 들이 있는데, 백제와 신라의 교전지라 한다. 양국의 국경지에 접한 삼년산성 일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됐던 것이다.

현재 삼년산성과 백제성 중간에 전쟁에서 죽은 말 무덤이, 보은군 삼승면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을 표시 했던 비석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보은 토박이인 나는 삼년산성 천년의 역사에 우리 조상이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했는지, 백제출신인지, 신라출신인지 모른다.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관리들이 호남을 차별했는지도 모른다. 영·호남의 지역 갈등이 보은에서 생겨났다면, 나는 어디에 줄을 서야 하나 생각해 본다.

구름이 흐르다 멈춘 곳, 그 곳이 내가 설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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