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희 음악평론가·백석문화대교수

최근 보도에 나온 지명 가운데 이탈리아 도시 베르가모가 있었다. 또 방송에서 자주 들린 클래식음악 가운데 달빛(Clair de lune)이 있었다.

고색창연한 옛 도시 베르가모가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달빛은 그 첫 소절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한 곡이다.

베르가모와 달빛!

상대적으로 낯선 도시와 친숙한 음악은 그러나 작곡가 드뷔시로 연결돼있다.

드뷔시 달빛이 드러내는 감성이 얼마나 아름다우면서도 사색적인지, 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음악인지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 주요 장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현빈과 손예진이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한 기운을 촉촉이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도 드뷔시 달빛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격동적인 시간이 지나고 다가 온 달빛같이 스며드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이곡만큼 적절한 음악이 또 있을까? 달빛이 쏟아지는 그 은은한 느낌을 피아노 음색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달빛은 그 자체로 드뷔시 음악이 내뿜는 탁월한 매력을 대변한다.

20세기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1862~1918)는 인상주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상주의 미술이 빛의 흐름에 따라 사물이 변하는 대상을 그렸듯, 드뷔시도 이미지를 병렬하며 느낌이나 장면을 환기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드뷔시가 인상주의 음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바그너 음악에 경도돼 있었던 젊은 시절 드뷔시는 이내 과장되고 거대한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반기를 들었다. 세련된 감수성과 우아함을 절제된 음색에 담아내는 프랑스 전통의 계보를 잇고자 했다.

마침내 러시아 음악의 화려한 색채와 동양음악의 이국적 특징까지 녹여내 독창적인 드뷔시 음악을 창조했다. 1890년에 작곡한 달빛은 인상주의 음악을 예견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초기 낭만주의 기법의 풍성한 화음감이 돋보이는 곡이다.

그렇다면 가장 프랑스적인 작곡가 드뷔시가 이탈리아 베르가모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드뷔시 인생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작용했다. 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 최고의 권위 있는 콩쿠르 로마 대상은 재능이 뛰어난 파리음악원 출신 음악가에게 3~5년간 이탈리아에 머물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드뷔시는 22세인 1884년, 칸타타로 로마 대상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약 2년간 지냈다.

걸작 달빛은 유학시절 베르가모를 여행했던 추억과 베를렌느의 시 달빛을 읽고 떠오른 영감, 그리고 섬세하고 세련된 작곡가의 낭만적 감성이 합쳐져 탄생했다.

달빛은 베르가모 지역의 춤곡을 모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Suite Bergamasque) 4곡 중 세 번째 곡 제목이다. 이곡은 춤곡이라기보다 한 편의 서정적인 시를 음악으로 듣는 것 같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느의 시에서 베르가모의 매혹적인 가면극 광대들은 환상적인 가면을 쓰고 루트를 연주하며 춤을 춘다. 그들의 모습은 기괴하고 슬프지만 광대들이 부르는 노래는 달빛과 뒤범벅이 된다.

이러한 달빛은 고요하면서도 슬프다. 아름다운 달빛은 나무의 새들을 꿈꾸게 만들고, 가늘고 커다란 분수를 황홀함으로 흐느끼게 한다.

지극히 몽환적인 베를렌느의 시가 꿈꾸던 언어적 유희는 드뷔시의 음악 속에서 그 환상적 자태를 황홀히 드러냈다. 드뷔시 달빛은 그 옛 시절 이탈리아 도시 베르가모를 비췄다.

어려움을 겪은 현재의 베르가모도 비추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고요히 그 빛을 드리운다.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도 음악은 마음의 평정을 주는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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