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제24사단의 필사적인 저항을 타파하고 대전에 진입하는 인민군 제3사단(1950.7.20). 전인석씨(목동성당 사목위원)제공
▲ 미 제24사단의 필사적인 저항을 타파하고 대전에 진입하는 인민군 제3사단(1950.7.20). 전인석씨(목동성당 사목위원)제공
▲ 카다르 요셈 신부. 전인석씨(목동성당 사목위원)제공
▲ 카다르 요셈 신부. 전인석씨(목동성당 사목위원)제공

72 공산당 충남도 정치보위부 66일 (1)
인민군 제3사단, 대평리 점령 뒤
유성 갑천 넘어 대전시가지 포격
딘 장군,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
7월 21일 인민군, 완전히 장악
주임신부 성당 지키다 압송… 순교
정치보위부, 목동성당·수도원 접수
군·경 가족, 공무원, 우익인사 색출
3119명 목숨 빼앗는 만행 저질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24일 만에 인민군은 대전을 위협했다.

미 제34연대는 악전고투하며 싸웠으나 7월 8일 천안 전투에서 연대장 마틴 대령이 전사하는 등 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를 거듭한 끝에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탱크를 앞세워 물밀 듯 내려오는 적에게 재래식 무기 뿐인 미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대전을 향해 진격하던 인민군 제3사단은 금강에 이르러 도강작전을 감행했으나 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쉽게 강을 건너지는 못했다.

인민군 3사단장 이영호는 금강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한 끝에 마침내 7월 16일 야간을 이용하여 결사적으로 강을 건너 대평리를 점령했다. 이때 인민군도 금강이 핏빛으로 물들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금강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충남도청에 있던 정부는 재빨리 주요 문서들을 챙겨 대구로 피난을 떠났으며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은 지금 월평공원과 대전비행장이 있던 탄방동에 지휘소를 설치하는 등 대전 사수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민군은 신탄진 쪽으로 계족산 줄기를 타고 대전 포위에 들어갔고, 7월 19일에는 유성 갑천을 넘어 대전시가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시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나서는 등 대혼란이 빚어졌다.

자신이 직접 바주카포를 어깨에 메고 탱크 사냥을 벌이던 딘 장군은 7월 20일 오후 5시55분, 사단 CP를 옥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것은 그가 군 지휘관으로서 마지막 내린 명령이었으며 이 명령을 끝으로 걸어서 남으로 내려가다 포로가 되고 만다.

7월 21일에 완전히 대전을 장악한 인민군은 즉시 북한식 행정을 펴기 시작했다.

우선 대전에 공산당 충남도당이 출범했고 각 시·군에 인민위원회, 경찰서는 내무서로 변경 설치되었다.

공산당 충남도당 위원장에는 남충렬.

그는 북한에서부터 내정되어 인민군과 함께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악명 높은 '정치보위부'는 대전시 목동에 있는 목동성당과 수도원에 자리를 잡았다.

군·경 가족, 공무원,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가두고 학살하는 잔인한 조직으로 알려진 정치보위부 부장은 ㅍ으로 악명이 높았다(그 유가족들을 고려하여 ㅍ으로 표기함).

정치보위부 부장 ㅍ은 인민군 대좌(대령) 군복을 입고 가슴에 권총을 차고 있었으며 산하에 보위과, 예심과 등 6개과에 26명의 부원이 있었다.

보위과는 우익인사, 공무원 등을 체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으며 예심과는 체포된 인사들을 조사하여 결과에 따라 즉석에서 총살형을 집행하거나 형무소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목동 성당과 옆에 있는 수도원에서는 고문과 구타로 비명 소리가 매일같이 울타리 밖에까지 퍼져 나갔다. 보휘부는 수도원을 형무소로 보내거나 처형하기 전 감방으로 사용했는데 40개의 방마다 붙잡혀 온 우익인사들로 가득했다.

이들이 목동 성당을 정치보위부로 잡은 것은 미군 폭격이 성당과 교회는 하지 않는다는 것과, 바로 300미터 가까이에 대전형무소가 있어 체포한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편리한 때문이었다.

물론 성당과 수도원 접수는 강제적인 것이었으며 목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프랑스 출신 카다르 요셈(J.Cadars) 신부는 피란을 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다 체포되어 북으로 압송돼 중강진에서 순교하였다.

공산당 충남도 정치보위부는 7월 21일부터 9월 26일까지 66일 동안 대전을 장악하며 1557명 충남도 전체는 3119명의 우익인사, 경찰, 공무원, 양민들 목숨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당 충남도지부장 남충렬은 미군과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대둔산으로 잠입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계속)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여기에 수록된 일부 자료는 전인석씨의 '대전목동성당-박해와 12사제 순교사'를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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