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거리 홍보간판, "두려움 없이 함께" 사진=연합뉴스

14세기에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참혹한 재앙이었다. 정확한 기록과 통계가 전해지지 않아 그 피해 규모는 사료와 짐작에 그칠 따름이다. 그 이후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염병은 1918년 전세계를 휩쓴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었다. 1차 세계대전 막바지, 강대국 여러 나라들이 전쟁 중이라 엄격한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반면에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던 스페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독감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유럽 여러 전장에서 스페인 방송 등을 통하여 인플루엔자 소식을 전해들은 연합군 장병들은 아무 생각 없이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면서 발원지가 아닌 스페인 이름이 덧붙여져 지금까지 통칭된다. 진원지는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중국이라는 추측이 있을 따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00만-5,000만, 당시 세계인구를 감안할 때 미증유의 재앙으로 꼽힌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코로나19는 아시아를 거쳐 중동을 지나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되어 끝없는 희생과 소모적인 손실들이 누적되고 있다. 4월 1일 현재 확진자는 미국 18만 여명, 이탈리아 10만 여명, 스페인이 9만 여명 그리고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이 모두 1만 여명을 훨씬 넘어섰다. 이들 모두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중진국이나 개발도상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힘센 나라들이다.

오랜 경험을 통하여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운영체계, 높은 국민소득과 그에 걸맞는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 구축 그리고 첨단 의학기술과 촘촘한 방역망, 개인위생관념 등으로 쾌적하고 보호받는 삶을 향유하려니 생각했던 국가들이다. 그런 인식과 관점이 올 봄 허무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직 끝없는 확산추세로 섣부른 예단이나 전망이 불가능하겠지만 선망했던 선진국 사회가 보여주는 뜻밖의 현실과 혼란이 주는 충격은 크다.

저력과 막강한 국부(國富)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지만 21세기 국가경쟁력을 국민들의 복지와 쾌적한 일상을 보장한다는 척도로 가늠한다면 이제 코로나19가 진정된 이후 새로운 시각과 기준으로 국가경쟁력과 국민들의 삶의 질, 저력을 평가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특히 지금까지 서양의 시각과 유럽 중심 관점으로 동양을 평가하고 재단해온 사고방식과 인식을 지칭하는 '오리엔탈리즘' 역시 새롭게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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