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유성 온천 이야기
이성계, 도읍지 공사현장 때 방문
태종 이방원도 즉위 후 다녀가
1919년 '라디움 온천’ 밝혀져
일본 귀족 ‘봉명관’ 온천장 세워
충청도 갑부는 ‘유성호텔’ 건립
박정희 대통령, 만년장 애용
정적관계는 '유성호텔' 선호

▲ 유성호텔. 대전시 제공
이승만 박정희 조병옥 이기붕 김종필. 연합뉴스
연합뉴스

유성은 겨울에 눈이 쌓여도 땅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 금새 녹아 버리는 웅덩이가 있었다. 지금의 봉명동 일대다.

사람들은 그것이 신기했고 동네 아낙네들은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 빨래를 해서 좋았다.

그러는 한편 상처 입은 학이 날아가다가 이곳 웅덩이에 몸을 담갔더니 훨훨 날게 되었다는 전설이 말해 주듯 피부병 등 여러 가지 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이 찾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태조 이성계 일지 모른다. 그는 지금 3군 사령부가 있는 계룡대(신도안)에 조선의 새 도읍지 공사 현장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유성에 와서 몸을 씻고 갔다. 그럴 때면 당시 왕자 신분이었던 방원이 수행을 해서 이곳에 왔는데 그가 훗날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 후에도 이곳을 다녀갔다.

이런 유성 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 때 부터다. 특히 1919년 일본 동경대학 아기스라는 교수가 이곳 온천수를 분석하고 아주 우수한 라디움 온천임을 밝히면서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모았다.

지하 285~600m에서 나오는 물로 섭씨 42~65도의 수온에 신경통, 피부병, 당뇨, 위장병에 좋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본 귀족이 현재의 계룡스파텔(전 국군휴양소) 자리에 봉명관이라는 온천장을 세웠고, 이어 1922년 충청도 갑부 김갑순이 지금의 유성 호텔을 설립했으며 그 옆에 '만년장'이라는 또 하나의 '온천 도시'로 변모했다. 만년장은 그 후에 리베라 호텔이 되었다가 최근에는 폐업을 했다.

김갑순이 세운 유성호텔은 조선 총독 사이또 등 고위 관리들이 자주 왕래했는데 여기서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는 계략이 펼쳐지기도 했다.(본 연재물 48회 참조)

김갑순은 1939년 호텔을 증축했는데 이때 사용된 목재가 지금 세종시 금남면에 있는 민족 종교 '금강대도' 건물을 강제로 철거하여 가져 온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금강대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김갑순은 조선 총독부와도 밀접한 친일 거두여서 꼼짝 없이 당해야 했다. 물론 지금은 그 건물이 6·25때 소실되는 등 당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미국에서 돌아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유성호텔에 왔었다. 물론 그때는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여사가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불평을 했다. 화장실이 수세식 변기가 아닌 그냥 양변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 부랴부랴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KTX가 달리는 등 지금은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유성은 국토의 중심에 있어 VIP들이 자주 들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성호텔 보다 만년장을 자주 이용했는데 그래서 인지 당시 이기붕 등 여권 인사들은 만년장을, 야권 인사들은 유성호텔을 선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오는 날에는 종업원들이 인근 촌락에 가서 깨끗한 호박잎을 구하러 다녔다. 호박잎을 쪄서 된장으로 쌈을 싸 먹는 것을 좋아 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정적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 신익희, 조병옥, 장면 같은 분들은 유성호텔을 선호했는데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여권 인사면서도 유성호텔에 자주 들렀고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자신이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살리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만년장을 선호했다.

물론 유성호텔에도 대통령의 전용 룸을 마련해 놓고 있었지만 별로 이용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성 온천은 찬란한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관광특구의 이름이 무색할 만큼 옛 영화가 퇴색해 가고 있어 안타깝다. 다시 유성 온천의 부활을 바랄뿐이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