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세종시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

초려 이유태 (1607~1684) 선생은 효종의 북벌(北伐) 계획에 참여한 밀지오신(密旨五臣)으로 사계(沙溪)선생의 고제삼현(高弟三賢) 가운데 한 분이다.

우암, 동춘 선생과 더불어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지며 기해봉사(己亥封事)를 통한 조선 중기 이후 최고의 경세사상가로 더욱 유명하다.

기해봉사는 북벌을 뒷받침하기 위한 만전지책(萬全之策)으로 포괄적인 국정개혁안을 담고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 경국대전과 율곡 이이, 남명 조식선생의 개혁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당시의 현실에 맞게 가감함으로써 임병양란이후 조선의 실질적 혁신과 개혁을 위한 대 방책이었다.

초려(草廬)선생은 먼저 향촌(鄕村)의 조직과 규율, 학교 교육, 인재 선발, 공안(貢案)과 세제(稅制)의 개혁, 전답의 측량, 관리의 승진과 퇴출, 군사의 조직과 훈련, 군수자금의 조달 등을 망라하여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개혁책을 모색하였다.

기해봉사가 변통적 시무책(時務策)이었던 만큼 율곡의 갑술봉사와 남명의 무진봉사와 같은 맥락에서 설폐론(設弊論)으로 부터 국정 혁신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아울러 병역과 부세(賦稅)에 있어서도 모든 국민의 균등한 부담을 제안했고 특히, 지배층의 부당한 특권을 철저히 타파하고자 했다.

초려는 내수사(內需司)의 혁파, 궁장(宮庄)과 충훈부(忠勳府)의 특혜 철폐, 양반자제의 병역부과 등을 강력 주창했는데 이는 지배계층의 부당한 특혜를 타파하여 조세지원과 병력지원을 확대함으로써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국력 신장을 위한 정책을 추구한 것이었다.

또한, 실행 가능하고 실제 민생에 도움이 되는 방안들을 모색했는데 먼저 백성의 세율을 낮추는 것은 그 실효성이 없다고 보고 대신, 부역을 줄여줄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농민이 전답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율을 낮추는 것은 부호를 더욱 부호로 만들어 줄 뿐이어서 대신 부역을 감면함으로써 민생에 실제로 기여해 주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의 현안이었던 공안문제 역시,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통해 공물제도 자체의 폐지를 꾀했다.

아울러 번상(番上)하는 군사들을 대상으로 무예를 시험하여 무관으로 임용하거나 면천시킴으로써 군대의 내실도 기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 몽재(蒙齋)의 설치를 제안하고 기존의 향교?사학(四學)과 성균관의 2단계 교육제도를 몽재, 향교와 사학 그리고 성균관의 3단계 교육제도를 제시하고 10세가 되면 몽재에 입학시켜 15세가 되어 공부에 자질이 있으면 향교, 사학으로 진학시키고 그 밖은 오위(五衛)에 편입시켜 백성들이 일찍 자기 소양에 따라 입지를 정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과거제도에 대해서도 임강(臨講 즉, 책을 보고 읽어가면서 해설하는 것) 제도와 문무(文武)를 아울러 시험할 것을 제안하고, 기존의 배강(背講, 돌아앉아서 책의 내용을 외우는 것)으로 시험 보는 것은 선비들이 경전을 암송하기만 하고 그 뜻을 궁구(窮究)하지 않았으니 시험방식 역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부터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험과목도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무경칠서(武經七書)까지 포함시키고 활쏘기 등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오위체제의 복귀와 기타 잡세(雜稅)까지 모두 군자별창(軍資別倉)으로 보내 상번군의 급료로 활용할 것 등을 제창했지만 효종의 승하로 기해봉사의 실행은 그 추동력을 잃고 그의 아들 현종 조에 이르러 거론되었으나 초려문집에선 현종은 심약하여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기술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현종 조에 보면 수십 차례 왕명이 있었으나 초려는 어머니의 병환을 칭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우암, 동춘 선생의 간곡한 청(請)도 있고 하여 올라가 도승지가 대독하는 자리에 현종이 중간 중간 그 의미를 물으면 초려가 대답하는데 현종은 기해봉사를 강독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옳다 옳다하며 의정부에 바로, 시행 안을 만들어 오라는 하교를 내렸지만 조선중기 이후 조야(朝野)에서 이의 시행은 논쟁만 하다가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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