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연우 세종시학교안전공제회보상심사위원회 위원
▲ 이연우 세종시학교안전공제회보상심사위원회 위원

이연우 세종시학교안전공제회보상심사위원회 위원

기해봉사(己亥封事)는 조선 중기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선생이 제진(製進)한 4.2만자에 달하는 대상소문이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산림(山林)을 초치해 북벌(北伐)을 추진했는데 초려는 이를 뒷받침하고자 기해봉사에서 종합적인 혁신 개혁안을 제시했다. 기해봉사는 연산군 이래 문란해진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 왜란과 호란으로 쇠잔해진 국력을 부흥시켜 국가를 다시 반석위에 올려놓자는 취지와 방략으로 일관되어 있다.

기해봉사의 서론부에서는 역대의 치란을 개관했다.

치란은 반복되는 것으로 위기를 인식하고 때에 맞게 개혁하면 치(治)를 이룰 수 있고, 현실에 안주하여 개혁을 게을리 하면 난(亂)에 봉착한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개해봉사 본론부는 설폐론(設幣論), 구폐론(救弊論), 군덕론(君德論)으로 나뉜다. 설폐론은 당시 조선 현실을 비판적 관점에서 진단한 것이다. 초려는 당시 국정을 실공(實功 즉, 진실한 노력)이 결여돼 실효(實效 즉, 진실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파악하고 진단했다.

구폐론은 설폐론에서 지적된 폐단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들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개혁안으로서 정풍속(正風俗), 양인재(養人材), 혁구폐(革舊弊)를 3대 강목으로 삼고, 그 아래에 16조목을 설정하여 개혁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밀지오신(密旨五臣)으로 두 차례 효종의 부름을 받고 금산 초옥(草屋)에서 보름 여 만에 작성, 효종의 북벌의 당위성과 목적에 부합하는 만전지책(萬全之策)으로 제진한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300년은 초려 기해봉사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조야에서 논쟁만 하다가 말았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기해봉사는 율곡 이이의 갑술봉사와 남명 조식의 무진봉사와 더불어 3대 국정 대혁신 개혁안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기해봉사가 시행되면 향약(鄕約)의 적(籍)이 정해지고, 오가(五家)의 통(統)이 바르게 되며, 사창(社倉)의 저축이 많아지고, 학교의 정사가 닦여지며, 과거(科擧)의 법규가 세워지고, 오위(五衛)의 제도가 회복되며, 병식(兵食)의 바탕이 풍족해 진다고 진단했다. 이는 오가의 통이 바르게 되면 호적(戶籍)이 여기에 있고, 군적(軍籍)이 여기에 있어서 사람이 등록되지 않은 경우가 없고, 부역(賦役)은 고르지 않을 경우가 없으니 팔도(八道) 인구를 앉아서 헤아릴 수 있고 한 나라 부역을 앉아서 책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누락된 인정(人丁)을 색출해서 채워도 곧 바로 도망가는 폐단이 사라지고, 일족(一族)이 침해를 당하고 절친한 이웃에까지 파급되는 폐단도 사라지며, 양반 자제들이 한가하게 노는 폐단도 사라지며, 양민(良民)과 어린이, 노약자만 치우치게 수고하는 폐단도 결국, 사라진다고 설파했다.

군덕론, 역시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논한 것으로 수기론(修己論)과 제가론(齊家論)으로 대별된다. 수기의 항목은 입지(立志), 수렴(收斂), 궁리(窮理), 성실(誠實), 양기(養氣), 정심(正心), 검신(儉身) 등 이다. 제가론은 크게 윤리를 바로 잡고, 은의(恩義)를 두텁게 하며, 절검(節儉)를 숭상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부에서는 비상한 시국을 당해 개혁에 임하는 통치자 자세를 논하고 모든 것은 결국, 군주 한 마음으로 규결된다는 맥락에서 효종의 분발을 촉구했으나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기해봉사는 추동력을 잃고 그의 아들 현종 조에 이르러 기해봉사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논쟁만 하다 소일하였다.

그 후 다시 개혁에 당위성은 거론되지 않았으며 후기로 가면서 삼정의 문란과 민심의 동요 그리고 사화와 당파로 나뉘어져 나라는 쇠망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 COVID-19로 나라 안팎에서 어려운 때, 초려선생의 개혁사상이 더욱 강조됨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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