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강동대학교 교수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벗어나려고 방향 없는 겨울여행을 떠났습니다. 사면이 벽으로 느껴지는 질식할 것만 같은 현실을 탈피해 흰 눈이 덮인 텅 빈 들판을 지나 끝도 없이 달렸습니다. 사면이 확 트인, 자유로이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만으로 겨울바다 앞에 섰을 때 당신은 마치 나의 분신처럼 먼저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푸른바다는 우리가 여기로 달려와서 부서지는 하얀 파도 뒤로 거대하게 펼쳐진 짙푸른 바다의 의미가 마치 우리인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처럼 느껴졌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몸을 맡기고 겨울바다 앞에 서니 이제껏 살아온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졌으며 마치 한줌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형체 없이 빠져나가 무수한 모래 밭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우리를 지탱해 주던 한줌의 땅마저 깊숙이 침몰해 버리고 우리는 형체 없이 떠도는 영혼이 되고 있었습니다. 우린 잠시 현실을 잊기로 했고 우리가 탈출해 온 세속의 갈등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포말처럼 무상하며 더 깊은 인생의 오묘함은 도도히 흐르는 바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겨울바다 앞에서 우리는 약속했습니다. 삶에 부딪쳐도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제는 동요 없이 흘러가는 바다처럼 항상 푸르게 살기로 말입니다. 그날 바다와의 해후에서 우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쌓인 두터운 가식의 얼굴을 버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해맑은 웃음과 빛나는 눈동자를 갖기로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맨 처음 겨울바다 앞에 섰을 때의 초췌한 모습이 아니었으며 기나긴 겨울밤의 어둠을 헤치고 막 솟아오르는 아침 해의 찬란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머나먼 추억속의 당신을 만나서 또다시 겨울여행을 떠나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삶의 쳇바퀴 속에서 현기증도 느끼지 못하고 다람쥐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의 갑작스런 출현은 방향도 모르고 달리던 나를 일깨워 또다시 탈출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항상 버릴 수 있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용감히 현실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떠날 수 있는 자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그때의 겨울여행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내 앞에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난 당신을 그동안 세월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겨 실려 온 나를 더욱 왜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끔은 세월을 따라 흘러가다 가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물고기의 지혜도 배워야 함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역류를 헤쳐 나갈 강한의지와 인내심을 가질 때 입니다. 겨울의 파헤쳐진 빈들의 지혜와 만족된 삶보다는 비워진 삶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더 깊은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텅 빈 들판 위에 다시 초록의 무성함이 뒤덮일 때 까지 우리는 수많은 고뇌의 밤을 보내야 할 것 입니다.

이제 기약 없이 당신과 헤어져도 슬프지 않은 것은 각자의 삶의 길을 가다가 오늘과 같은 우연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 따스한 눈길 마주하면서 빛나는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과거라는 이름으로 채색되어 추억 속에 잠재워 진 시간들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한 잔의 커피 향과 함께 아련히 되살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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