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 전 천안시 복지문화국장

필자는 딸만 셋을 두었다. 매사 활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첫째, 둘째와 달리 막내는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이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무엇을 시키든 늘 군말 없이 하는 편이다. 그런 막내딸이 취업을 하고선 혹여나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힘들고 불편한 일이 있어도 어디에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는 경우가 많아 첫 출근을 하고 몇 달을 힘들어했다. 한동안 자신감 없이 축 처진 어깨로 출퇴근을 하는 걸 보면서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달리 해줄 말도 없었다.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런 게 아니던가.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하지 않던가.

나 역시 종종 딸에게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리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딸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웃음도 많아졌다. 회사일을 물으면 미간부터 찡그리더니, 요새는 오히려 일할 만하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딸을 관찰했다. 달라진 건 ‘펭수’. 막내딸 휴대폰의 배경화면이 펭수였다. 그러고 보니 가방에도 펭수 인형이 달렸다. 며칠 전엔 펭수를 보러 방송국에도 다녀왔단다. 요즘은 펭수에게 푹 빠진 소녀팬이 됐다. 나는 펭수를 잘 모른다. TV 예능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것을 몇 번 봤을 뿐이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웃긴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딸에게 물어보니 본래는 유튜브 활동을 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유튜브에서 펭수를 찾아봤다. 하도 웃기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몸개그를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그저 말만 하는 캐릭터였다. EBS 연습생이라면서 EBS사장과 PD를 거침없이 호명하며 원하는 바를 얘기했다. 처음엔 무슨 내용인 줄 몰랐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 펭수가 하는 말마다 속이 시원했다. 소위 꼰대들에게는 정곡을 찌르고, 청년들에게는 투박하지만 위로가 되는 말이더라. ‘눈치 챙겨’ ‘눈치 보지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사장님이 친구 같아야 회사도 잘 된다’ 등.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뱉는 말들이 60대인 내 마음에도 와 닿았다. 며칠 뒤 딸에게 펭수 어록을 건네며 말을 붙였다.

딸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요즘 펭수 덕에 회사 다닐 맛이 난다는 거다. 회사에서 화나고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펭수 덕에 위로를 받는단다. 가끔 상사가 부당한 말을 할 때는 펭수 어록을 빗대 대꾸도 한단다. 그전까지만 해도 참는 게 미덕인 줄 알고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말도 못 하고 참았는데, 펭수에게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고 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사회초년생으로서 힘들어하던 딸에게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라며 참고 견디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90년대생에게 60년생의 사회생활 조언이 제대로 됐을 리 만무한데, 그걸 이제야 알았다.

딸은 펭수 덕분에 할 말은 하고 살면서 회사 생활이 즐거워졌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능률도 올라 얼마 전엔 회사에서 상도 탔다. 쓸데없는 고민이 없어지니 얼굴이 늘 밝다. 요즘은 그 누구에게도 ‘참고 견디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껏 떠들라고 말한다. 나 역시 젊은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한다. 잘 듣는 것만큼 잘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펭수 덕에 알았다. 참고 견디는 미덕은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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