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28일은 부여 백강에서 한·중·일 3국이 이 땅에서 첫 국제 전쟁을 벌인지 1359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날 강대국들의 틈 바위에 끼어 고초를 겪어야 하는 한반도의 운명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660년 7월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정복시켰지만 전후 처리가 신라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해 왕자 및 신하 93명 그리고 1만2000여 백제 요인을 끌고 660년 9월 3일 당나라로 떠나 버린 것이다. 신라는 전승국이지만 아무것도 차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 했다.

서천 건지산성(舒川 乾芝山城)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사진=문화재청 제공
서천 건지산성(舒川 乾芝山城)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사진=문화재청 제공

당나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제를 신라에 돌려주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세워 의자왕의 왕자 융으로 하여금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니까 '친(親)당' 정권을 세운 것이다. 나아가 지금 공주 취리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눠 마시며 신라 문무왕, 백제 왕자 융 그리고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화해와 국경 존중의 맹세를 했다. 신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취리산회맹'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백제로부터 문화를 고스란히 전수받으며 각별한 친교를 누렸는데 그 백제가 당나라 지배하에 들어가다니…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돼 200개의 많은 성(城)들이 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흥운동의 중심지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주류성(周留城), 부흥군을 이끄는 지도자는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그리고 장군 흑치상지 이었으며 이들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모셔와 부흥 백제의 상징이 되게 함으로써 더욱 기세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한반도에 663년 8월, 2만 7000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그리고 이들 대규모 선단은 금강 하구를 통해 사비성(부여)을 향했는데 이것은 강 양편 산과 계곡을 우군이 확보해 주지 않는 한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이 먼저 이 지형지세를 선점했으니 일본군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다 한참 기세가 오르던 부흥군은 내분에 휩싸였다. 주도권 싸움에서 왕족 복신이 승려 출신 도침을 살해해 부흥군 진영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부흥군의 상징이던 왕자 풍이 도침을 살해한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피했고 부흥군의 최고 장군이던 흑치상지마저 진영을 버리고 당나라 유인원장군에게 항복을 했으니 부흥군은 그야말로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금강 양안의 안전 루트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군 2만7000명은 나·당 연합군의 협공에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8월 28일 백강전투는 그렇게 처참하게 끝났다. 이것이 한반도 역사상 한·일·중이 이 땅에서 벌인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 후에도 벌어질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의 신호탄이기도….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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