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 백성 먼저였고 자연 벗삼던 조선선비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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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백성 먼저였고 자연 벗삼던 조선선비의 품격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2월 13일 16시 3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2월 14일 금요일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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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209호 동춘당. 문화재청 제공
▲ 동춘당 현판. 문화재청 제공
▲ 송준길 행초 동춘당 필적. 문화재청 제공
▲ 옥류각. 이 건물 위쪽에 ‘초연물외’를 새긴 바위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 동춘당 공원 전경. 대전찰칵 제공
▲ 동춘당 내부 모습. 문화재청 제공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64 大德구 宋村동의 同春堂
보물 209호 동춘당… 400년 이어온 ‘멋’
효종때 병조판서 지낸 송준길, 북벌 앞장
효종 갑작스런 죽음으로 북벌의 꿈 무산
바른 길 아닐 땐 벼슬길 버렸던 송준길
서체도 수려… ‘문장은 우암, 명필은 동춘’
문장도 고품격… ‘선양민후양병론’ 압권
“북벌 중요해도 백성의 삶 안정이 먼저”
계족산 바위에 ‘초연물외’… 인생관 담겨
1672년 12월 눈 내리던 날 하늘로…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 계족산 아래 보물 209호 '동춘당'(同春堂)이 있다.

정면 3칸의 크지도 호화롭지도 않은 조선 중기 건축물이지만 집 주인의 고고했던 품격처럼 우아하고 청결하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원으로 개발됐지만 동춘당은 400년을 이어온 역사의 두께 만큼 고풍스런 멋을 지키고 있다 .

'동춘당'이라는 호로 더 널리 알려진 송준길(宋俊吉). 그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되는 병조판서로 재직하는 동안 효종 임금을 중심으로 11촌 숙질 관계에 있던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청(淸)나라를 공격하려는 이른바 '북벌'(北伐)을 추진했던 인물.

학자에 따라서는 북벌정책에 회의를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한 청나라 정벌의 구체적 계획이 깊숙이 진행된 건 사실이다.

청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대장간 마다 칼과 창을 만들게 했다. 또한 함경도 병마사 등을 역임하며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북벌의 진용을 갖추었다.

이완 대장은 네덜란드 상인들로 일본으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과 그 일행 30여명을 병영에 머물게 하고 그들로부터 조총을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 이완 대장은 북벌을 추진하는 송준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온 나라가 북벌의 분위기로 뜨거워 졌는데 백성들도 이불에 홍깃을 붙여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바로 군복으로 만들 수 있게 했다. 당시 군복은 홍깃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인들은 평상시 빈 포대를 지참케 하여 갑자기 적과 마주치면 그안에 흙을 담아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이처럼 빈틈없이 북벌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자점이 청나라에 내통하여 모든 비밀을 알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론 큰 혼란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달래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송준길은 김자점을 탄핵, 귀양 보냈으나 1660년 북벌의 중심에 있던 효종이 54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북벌의 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국가도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병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등 많은 직위를 거쳤으나 바른 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직위도 서슴없이 저버렸으며 그럴 때마다 이곳 동춘당에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 특히 성리학에 몰두한 송준길.

그는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그의 서체는 한석봉체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으며 당시 ‘문장은 우암, 명필은 동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장 역시 높은 경지에 있었으니 '선양민후양병론(先養民後養兵論)’ 같은 것이 그것이다. 아무리 북벌이 중요하다해도 백성의 삶이 안정되게 한 후에 병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민생경제'가 제일 중요하고, 우선적으론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니 그의 깊은 국정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철학과 인생관을 표현한 것이 또 하나 남아 있으니 계족산 아래 비래사 입구 바위에 새겨 놓은 글이다. '초연물외(超然物外)’, 서체도 힘이 있지만 '세상 물욕을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이렇듯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벗 삼아 살기를 바랐던, 그래서 그의 호마저 '동춘당'이라 했던 송준길은 1672년 12월 2일, 백설이 꽃잎처럼 내리는 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