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 충청남도교육청연구정보원원장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약속을 하게 된다. 선거철이 다가오는 요즘 쏟아지는 갖가지 달콤한 공약들로 매스컴이 요란하다. 그들이 4년 전 우리와 했던 약속은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꼼꼼히 따져보고 싶다.

약속은 정말 지키기 어렵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약속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약속이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던 경험을 고백한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6년이었다. 그는 동갑내기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이 같은 천진스럽다 못해 장난기가 섞인 싸움꾼 같은 말투는 가끔은 뭐가 본심인지 몰라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이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는 우리와는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이는 나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말은 말을 낳고 더 나아가 그를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그와 나, 선배 둘과 함께하는 모임일은 매월 월급날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급을 노란색 봉투에 현금을 담아 주었다. 모임이 결성되고 처음으로 모인 날 그가 월급봉투 항목 중에 '연구비'는 우리가 더 공부하라고 주는 것이니 그만큼 매달 책을 사서 보자고 첫 번째 약속을 제안했다. 어떤 힘에 끌려 우리는 밥을 먹고 서점으로 가서 각자의 '연구비' 만큼 책을 골라 귀가했다. 그의 제안은 평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지금껏 지켜온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날도 몇 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두 번째 약속은 아이들과의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주체적인 삶은 읽기와 함께 글쓰기로 가능하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는 글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통째로 들어 있어야 되기에 아이들에게 매년 문집을 만들어주자고 했다.

파라핀 용지를 철필로 긁어 갱지에 인쇄한 1986년 '소나무골의 아이들'로 시작해 학급문집, 교과문집, 학년문집, 도서관문집으로 바뀌면서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의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1998년에는 '북두리의 아이들'이라는 학급문집 후기에 편집장이 '우리 20년 후에 만나자'고 썼다. 물론 나는 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2018년 8월 15일 오전 12시. 여러 차례 울리고 받은 집 전화기에서는 조심스럽게 나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자들에게 약속을 잊은 교사로서 미안함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30대 중반으로 당당하게 성장한 제자들과 저녁이 다가도록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만난 '그'로 인해 만들어진 약속으로 만들어진 내가 꾸준히 책을 읽는 습관은 내 삶의 자양분이 되고 '그'로 인해 시작된 문집 만들기가 20년 전의 제자와 소통할 수 있는 거멀못이 됐다.

선거철만 되면 녹음기를 트는 반복되는 공약들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의 약속을 걸 때마다 그 무게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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