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숭의사보존사업회장

성암 선생은(1867~1919년)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초려 선생의 9세손으로 절개와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구한말 최고의 유학자로 일컬어졌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선생은 먼저 일제의 민적(民籍)에 가입하지 않는 운동을 적극 펼쳤다.

1909년 3월 일제 통감부는 조선의 백성을 일제의 백성으로 둔갑 시키려는 민적법을 공표했다. 이에 선생은 "치일국정부서 재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 再致日國政府書)"를 일왕에게 보내 "이제 일본이 교린의 의리를 생각지 않고 속임수와 겁박으로 여러 번 조약을 바꿔 마침내 우리 정부를 빼앗고 우리의 500년 종묘사직을 전복하고 3000리 강토를 유린해 억만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다. 이제 우리 조국이 망해가는 때를 만나서 이미 의병을 일으켜 복수를 하지 못하고 부월이 무서워 호적에 편입해 적국에 가담한다면 이는 오랑캐가 되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금수가 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성암은 이처럼 일제를 비판하면서 민적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수차례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1912년 8월 일제의 식민지배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토지조사령에도 불구하고 성암은 "사가(私家)의 휴척(休戚)은 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저 원수들에게 동정을 구걸한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 70정보가 넘는 산판(山坂)을 모두 빼앗겼다.

일제의 횡포는 민적 편입을 강요하고 토지 측량으로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조상의 무덤에 대해서도 묘적(墓籍)을 만들어 등록하라고 협박했지만 성암은 무덤과 함께 화를 받을지언정 어찌 장차 왜적에게 묘적을 바치겠는가 하고 강력 저항했다.

특히 선생의 신학(新學) 설치의 반대와 칭제건원(稱帝建元)의 반대는 더욱 유명하다. 이는 1895년 갑오개혁 이후 가장 첨예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지만 일제의 식민정책을 반대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항일운동이었다. 칭제건원 역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려는 속임수이며 이의 장단을 맞추는 것은 매국이라고 규정했다.

‘독립청원서’ 거부 또한 개화한 서구열강들에게 우리의 독림을 청원한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청원을 수용해 줄 리도 없지만 설령 수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선생의 갑인일기(1904), 기유일기(1909), 경술일기(1910), 무오일기(1918) 등 옥중일기에 나타난 독립의 길과 조건은 인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성암 선생이 1867년 나셨으니 1869년에 태어나신 간디와 2년이 앞서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돌아가셨으니 간디와 함께 80여세로 오래 사셨으면 세인(世人)에게 그 꼿꼿한 정신과 사상이 더 빛나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비폭력, 비협조, 불복종 운동은 간디의 영국 식민지배에 맞선 인도의 정신과 그 궤(軌)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다시 한 번 간디의 침략문명을 상징하는 서구문물에 반대해 물레로 실을 잣고 신식 옷 대신 인도의 물감 천을 몸에 두르고 둥근 안경을 쓴 성자(聖者)의 모습에서 신학(新學)을 반대하던 고매한 성암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

세 차례 부여옥(扶餘獄)에 들어왔으니 죽고 삶은 저 하늘에 맡기었노라! 험악하나 평이하나 한 절개(節介) 지키어 나의 소당연(所當然)을 따를 뿐이네!

생사를 하늘에 맡기고 오직 절개를 지켜 당연한 도리를 따르겠다는 선생의 서슬 퍼런 시(詩)를 다시 읽으며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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