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62 제천의 박달재
72년 국민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박달·금봉이의 애달픈 사연 담겨…
천등산 박달재…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고려때 거란 침략 막아낸 승전지
천주교 순례 명소 배론 성지도 유명
바티칸 보관 ‘황사영 백서’ 진원지

▲ 배론 성지. 제천시 제공
▲ 배론 성지. 제천시 제공
▲ 제천시 마스코트인 박달과 금봉이.  제천시 제공
▲ 제천시 마스코트인 박달과 금봉이. 제천시 제공

[충청투데이]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해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로 끝나는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재홍 노래는 1948년에 발표됐으니 무려 72년이 됐다. 이렇게 오래 됐으면서도 나훈아, 김연자 등에 의해 계속 애창됐고, KBS '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그리고 방송 횟수 전체 1위를 조사했더니 역시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물론 노래방에서도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절절한 사람의 아픔, 아주 서민적인 가사, 노래를 부르는 동안 머릿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천등산 박달재 풍경이 그렇게 장수를 누리는 것 같다.

원래 박달재는 없는 이름.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를 잇는 '이등령'이라 불리어 졌는데 한 쌍의 젊은 남녀 사랑이야기가 구전되면서 '박달재'로 바뀌었다.

경상도에 사는 박달이라는 젊은이가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 날이 저물어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한 농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그 집 아름다운 처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사랑을 맺는다. 그 처녀가 금봉이. 서울로 간 박달 총각은 과거시험에 떨어져 금봉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 금봉이를 찾아온다. 금봉이는 산마루 고개에서 애타게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숨을 거두게 되고 뒤늦게 달려온 박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애틋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아예 고개 이름도 '박달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해발 453m에 길이 500m의 천등산 박달재는 첩첩 산중이라 험준한 계곡으로 이뤄졌으면서도 영남권과 제천, 충주,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도 한다.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 박달재 입구.  제천시 제공
▲ 박달재 입구. 제천시 제공

그래서 1217년 고려 고종 4년 7월에 북쪽 거란족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이곳에서 고려의 김취려 장군이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토록 험준한 지형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란국의 영남권 진출을 막아 낸 것.

제천시는 '박달과 금봉이’를 제천의 마스코트로 하고 이곳에 박달재 목각공원을 조성해 놓았는가 하면 박달재 노래비를 세워 관광객들에게 이색 체험을 하게 한다. 좋은 아이디어다.

이곳에서 가까운 천주교의 '배론 성지'도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순례 명소가 되고 있다.

배론 성지가 유명한 것은 첩첩산중에 자리 잡고 있어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옹기를 구우며 숨어 살기 좋았고, 충남 청양 출신으로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가 묻힌 곳이며 그 당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황사영 백서'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황사영은 1801년 이곳 배론의 토굴에 숨어서 '신유박해'의 진상을 중국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알리는 밀서를 썼다가 사전에 발각돼 순교를 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 밀서가 3311자에 달하는 방대한 것인데다 내용도 깊이가 있어 지금도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따라서 이곳 연못가의 두 팔을 벌린 예수상은 그 옛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같다.

험준한 산과 계곡이 얽히고설켜 섣불리 쳐들어 왔다 참패를 당한 거란족이야기, 박달 총각과 금봉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곳에 모여 살던 박해시대의 천주교 이야기… 박달재야 말로 우리 민족사의 압축된 한 페이지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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