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경양왕(頃襄王)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군주(君主)였다.

그는 아버지 회왕(懷王)이 진(秦)나라의 거짓 초청을 받고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억류되어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는데도, 왕에 오르고 나서 진나라에 대한 복수는커녕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장신(莊辛)이라는 대부(大夫)가 경양왕에게 간신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아 추락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부왕(父王)의 원수도 갚아야 한다고 간했으나, 듣기는커녕 그대마다 욕설을 퍼부으며 망신을 주었다. 그러자 장신은 이웃 조(趙)나라로 떠나고 반년도 못 되어서 진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침범하여 순식간에 도성(都城)까지 짓밟아 버렸다.

경양왕은 간신히 탈출하여 성양(城楊) 이라는 곳으로 쫓겨 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경양왕은 장신의 충간(忠諫)이 옳았음을 깨닫고 자신의 무절제한 생활을 깊이 뉘우치며 조나라에 가있는 장신을 불러 들였다.

장신이 귀국하자 경양왕은 그에게 지나 일들을 사과하면서 말했다. “과인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고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앞으로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이에 장신은 경양왕을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은 일찍이 들 토끼를 발견한 뒤 돌아서서 사냥개를 불러도 늦지 않고(견토이고견 미위만야:見兎而顧見 未爲晩也), 양을 잃은 즉시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망양보뢰 미위만야·亡羊補牢 未爲晩也)고 들었습니다. 옛날 은(殷)나라를 세운 탕왕(湯王)과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도 좌우 백리가 안 되는 좁은 땅에서 일어났지만 차츰 강성해져서 각기 은나라와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걸주(桀紂)는 비록 천하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방탕한 생활로 인해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 초나라의 땅이 비록 작아지긴 했으나 긴 것을 잘라서 짧은 것을 기우면(절장보단·絶長補短) 아직도 수 천리의 땅은 됩니다. 탕왕과 무왕이 겨우 백리의 땅으로 일어난 것에 비하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성어 망양보뢰(亡羊補牢)는 이처럼 장산이 인용한 옛 속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이 잘못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의 우리 속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와 달리 잘못을 즉시 뉘우치고 고치면 늦지 않다는 말을 지침으로 삼아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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