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61 보령의 토정 이지함
1517년 보령 출생… 고려 이색 6대손
임진왜란 등 예언… ‘토정비결’ 쓰기도
아산 현감때 만든 걸인청… ‘복지정책’
염전 임대·광산 개발 등 경영행정도
61세 일기 별세… 보령 고정리에 묻혀
숙종, 이조판서 추징
영조, ‘문강공’ 시호…

▲ 보령 앞바다가 보이는 이지함 묘. 문화재청 제공
▲ 보령 장현리 귀학송. 문화재청 제공
▲ 화암서원 유허비. 문화재청 제공
▲ 화암서원 유허비. 문화재청 제공
▲ 보령시 청라면에 있는 조선후기 이지함과 이산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화암서원 숭덕사.  문화재청 제공
▲ 보령시 청라면에 있는 조선후기 이지함과 이산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화암서원 숭덕사. 문화재청 제공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있다. 요즘처럼 경기가 불황이고 살기가 힘들다 보면 더욱 그렇다. 올해는 사업이 나아질까. 취업이 될까. 결혼은 성사될까… 등등.

이 토정비결을 만든 사람이 이지함(李之函)이다. 1517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는데 고려말 충신 이색의 6대 손.

그의 호가 '토정'이 된 것은 나이 들어 성루 마포 한강변에서 흙으로 지은 움막집에서 살았던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1573년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는 임진강의 범람을 예언, 임금에게 치수대책을 상소하는 등 그가 하는 모든 예언들은 척척 맞아 떨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만나려고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토정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으려고 아예 생년월일에 따른 운수를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토정비결'이라는 것이다.

사실 토정비결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보편적 경구(警句)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물가에 가지 마라. 먼 길을 가면 화를 입을 수 있다. 재물을 두고 다툴 운이 있다. 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송사수가 있다… 등등.

토정 이지함은 포천 현감을 지내고 충남 아산 현감에 임명됐는데 여기에서 그 인생 진면목을 발휘했다.

맨 먼저 시행한 것은 걸인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에 떠도는 걸인들을 모두 수용하고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아니라 걸인들에게 가마니 짜기, 염전에서 소금 만들기, 기와 굽기 등 그들이 소화할 수 있는 일을 시켰다.

이와 같은 일을 통해 걸인들은 직업기술을 익히게 됐고 자립의 터전도 닦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요즘 정부에서 주도하고 있는 사회복지정책을 이미 440여년전 시행한 것이다.

복지정책뿐 아니라 그는 요즘의 소위 '경영행정'을 실천한 인물이다.

지금의 아산시에 해당하는 아산 현감으로서 타 지역에 있는 염전을 임대해 수입을 올린다던지 광산을 개발하는 것, 무역을 권장한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직접 제주도에도 여러 번 다녀오면서 경영행정의 아이템을 찾기 위해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사회복지정책은 내부에서 심한 반발에 부딪힌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데 일개 현에서 걸인청을 만들고 엄청난 경비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며 아전들의 반발이 매우 컸다.

재정부담도 문제이지만 아전들은 밤낮없이 걸인들을 돌봐야 하고 현감의 지시대로 뛰어다니다 보니 불평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토정 이지함은 1578년 61세를 일기로 아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두고도 이질을 앓다 죽었다거나 그를 미워한 아전들 때문에 죽었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이 직접 터를 잡은 보령시 주교읍 바다가 보이는 고정리 산 언덕에 잠들었는데 충남 문화재자료 320호로 지정돼있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한강변 토굴 같은 집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입었던 도포까지 벗어주는 바람에 기인(奇人)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현감에 어울리지 않는 시책을 펴 경세가(輕世家)로 불리는가 하면 예언자로도 통했던 토정 이지함.

훗날 조정에서는 그를 굳이 기려 1713년 숙종 임금은 이조판서에 추징했고, 1761년 영조 임금은 문강공(文康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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