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60 대전 탄방동의 '명학소'(鳴鶴所)
고려 소외계층 양민 집단촌 ‘명학소’
유성현청 나졸들 주민 갈취·횡포…
망이·망소이 형제 “우리도 같은 인간”
주민들 유성현·공주 점령… 고려 명종, 토벌굴 3000명 급파
관군 패배·명학소는 충순현 승격… 차별 계속되자 다시 봉기
망이·망소이 형제 1177년 6월 항복… 청주감옥서 죽음 맞아

[충청투데이] 대전시 서구 탄방동 남선공원에는 844년 전 소외받던 백성들의 피맺힌 함성을 기리는 탑이 하나 서 있다<사진>. 도심의 숲속에 가려 있는 데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을 탑이라 사람들은 무심코 이곳을 지나지만 고려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사건을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 명학소라는 특수한 신분의 양민들이 이곳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양민이면서도 벼슬길에 차별을 받아 왔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에 종사해야 하는 소외계층의 집단촌이 명학소인데 고려시대 전국에 걸쳐 존재했던 제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유성현 동쪽 10리에 고려시대 명학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위치가 지금의 대전시 서구 탄방동 일대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1176년 1월(고려 명종 6년) 대사건이 일어난다.

이 무렵 공주, 유성 관가에서는 명학소 주민들을 동원해 산에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드는 노역을 시켰다. 그런데 주민들에게 너무 혹독하게 군림하는 유성현청의 나졸들에 원성이 높았다. 이때 명학소의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형제가 참다못해 행패가 심한 나졸을 두들겨 팼는데 이 때문에 이들 형제는 체포돼 구속되고 말았다. 명학소 주민들은 구속된 망이, 망소이 형제를 구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으며 그렇게 하여 어렵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관의 횡포는 그치지 않고 주민들을 갈취했으며 각종 부역에 동원했다. 이에 망이, 망소이 형제는 추운겨울 어느 날 공동 작업장에 동원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우리도 같은 인간이요 같은 백성인데 이렇게 차별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나를 따르시오' 하고 외쳤다.

고려사 연구로 저명한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는 이것을 '민중의 자각이며 혁명'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망이, 망소이는 스스로 '산행병마사' (山行兵馬使)라 칭하고 주민들을 무장시켜 유성현을 점령한 후 공주로 내달아 접전 끝에 공주를 함락시켰다. 명종 임금은 크게 당황하여 정황재를 대장군으로 하여 토벌군 3000명을 공주로 급파했다.

쌍방 모두 희생자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오히려 관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망이, 망소이가 이끄는 명학소 주민들은 사기가 높아져 인근 지역을 삽시간에 장악했다.

그러면서도 망이, 망소이는 여러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높여 줄 것을 조정에 건의했고 심지어 노약순이라는 자가 고려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사로잡아 조정에 넘기는 등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사태를 무마했다.

그러니까 망이, 망소이의 거사는 오로지 인권과 신분상승에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망이, 망소이는 그해 9월 다시 봉기를 한다. 이름만 '현'으로 승격시켰지 내용적으로는 명학소 때와 마찬가지라는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이, 망소이의 명학소 주민들은 철수했던 유성, 공주를 점령하고 차령을 넘어 예산읍까지 손에 넣는 등 광범위한 땅을 장악했다.

그러나 다음해 1월 조정에서 내려보낸 토벌군에 항복을 하고 일단 유성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세 번째 봉기를 하여 천안, 서산, 아산 등 충청도 거의 전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관군의 공격에 더 버티질 못하고 1177년 6월 항복을 했으며 망이, 망소이는 청주 감옥으로 이송돼 죽음을 맞이했다. 명학소 역시 충순현에서 다시 '명학소'로 강등됐으며 지금 그 함성을 기리는 비만 서 있어 지난 날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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