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 저어라 사공아 일편엽주 두둥실 /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가수 이인권 씨가 불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가요 '꿈꾸는 백마강' 가사다.

이렇듯 낙화암은 노래 뿐 아니라 시(詩)의 주제가 됐고 부소산과 백마강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했다.

낙화암은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백마강을 굽어보는 부소산 아래 커다란 바위 절벽으로 '타사암'이라 했다. 그 사연이 기가 막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 싸우는 대로 승리를 거두고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자 자만에 빠져 날마다 부소산성에서 연회를 여는 등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사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이에 좌평 성충(成忠)이 직언을 하다 감옥에 갇히게 됐고 그는 옥중에서도 단식을 하며 곧 신라가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를 하라고 글을 올렸다. 심지어 전쟁이 나면 육로로는 탄현(지금의 대전시 계족산~식장산)을 막고 해로로는 기벌길(지금의 서천 장항)을 지켜야 한다는 제언까지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충신의 감언을 무시한 의자왕은 660년 7월 11일 신라군과 당나라 연합군이 사비성(부여)으로 진격해 오자 그때 서야 성충의 경고를 무시한 것을 통회하며 가슴을 쳤다. 의자왕은 다급하게 나·당 연합군에 왕자와 고위 관료를 보내 화의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7월 13일 밤을 이용해 왕자 융과 좌평을 거느리고 웅진성(공주)으로 도피했다.

그러자 백제 왕궁에 있던 궁녀들이 부소산 낙화암으로 달려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궁녀들 뿐 아니라 의자왕의 후궁들도 함께 투신했다. 그래서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 했다는 것. 그러다가 여인들이 강물에 몸을 던지는 모습이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해 '낙화암'으로 변형됐고 그 죽음을 택한 궁녀들이 3000명이나 된다고 전해 왔다.

하지만 의자왕이 아무리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도 궁녀가 3000명이나 됐을까?

첫째 고고학자들이 백제 왕궁의 규모를 연구했는데 3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기거할 공간이 없더라는 것이며 낙화암 아래 백마강의 수심이 깊지 못해 그만한 인원이 몸을 던진다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나 어느 역사 기록에도 그런 숫자가 없으며 조선 중기 한 시인이 그렇게 구전되는 것을 읊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구전이라는 것도 패망한 군왕에 대해서는 도덕적 부패 등을 과장하는 것이 어느 시대나 있었던 만큼 믿을 것이 못한다.

물론 왕궁이 불타고 공포에 질린 많은 궁녀들이 다투어 몸을 던진 것은 확실하며 그 처연한 모습은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 같았고 그래서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 한 것도 타당할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여기 부소산 낙화암에 오르면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분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소산 소나무들을 흔들고 그 소나무 바람 소리가 궁녀들의 울음 같이 느껴진다.

낙화암과 조금 비껴서 고란사라는 유서 깊은 절이 자리 잡고 있음도 인상적이다. 절 뒤편 바위틈에서 흐르는 약수와 절벽에 붙어살고 있는 희귀한 난, '고란초'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028년 고려 현종 19년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궁녀들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 부부가 이 절을 방문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1400년 세월이 지났어도 낙화암 아래를 맴돌아 흐르는 백마강은 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듯하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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