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호 금산문화원장

제원면의 천내리에 들어서면 천내강을 바라보며 용과 호랑이를 조각한 석상이 280m 사이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모르는 누가 본다면 뜬금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른 논과 밭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서있다.

이 용호석은 고려 말 공민왕이 충북영동군 양산면의 영국사로 피난할 때 국상을 대비해 천내리 뒷산에 능소를 정했고 그 표식으로 용호석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전란이 끝나고 공민왕은 개경으로 복귀했고 방치된 용호석이 오늘 날까지 이른 것이라고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두 석상에 대한 근거가 되는 어떠한 역사적 자료도 없으며 그저 전설로만 이야기될 뿐이다. 왜 천내리에 만들어지게 됐는지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그저 추측과 구전되는 전설로만 짐작할 뿐인 것이다.

너른 들에 ‘용과 호랑이의 석상’이란 물리적인 구성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한 소재이다. 정말 전설대로 공민왕의 무덤 터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큰절의 자리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가 산을 지키는 호랑이와 물을 관장하는 용을 산과 물이 만나는 천내리에 장승처럼 세워 마을의 안위를 살핀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비밀을 돌입으로 꾹 다물고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용호석은 깊은 역사 이야기를 수 백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분명 금산의 가치 있는 이야기 중 하나 일 것이다. 그 꾹 다문 돌입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 중 하나를 해보려 한다.

그것은 바로 용호석과 공민왕 사이에 맞물려 있는 신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때는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후 공민왕이 신돈에게 나라운영의 모든 권한을 넘기고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할 때 신돈은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각도에 1명씩 7명의 승려를 모집해 당취(黨聚)라는 조직을 만들어 국가개혁의 힘을 실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륵신앙을 설명하자면 말 자체는 불교의 뜻과 연결돼 있지만 그 내면에는 민중이 종교에 기대어 현실의 압제에 저항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나락과도 같은 현실에 벗어나고 싶은 아니 차라리 죽어지낼 수 있는 나락보다 살아 있으면서 견뎌야하는 정치적·경제적인 지옥들이 민중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이것에 저항하는 것이 미륵신앙이며 미륵사상인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서 저 멀리에 있는 지상정토를 눈앞에 구현해 모두가 그지없이 행복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신돈의 의지이자 소망이고 이것은 곧 민중의 애원이자 꿈이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모든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신돈과 당취에 의해 설치된 ‘전면변정도감’이 부호들이 완력을 이용해 탈취했던 토지를 원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들의 자유마저 용인해주자 보수세력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신돈의 행보에 제동을 걸게 됐다. 이는 곧 공민왕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불안해진 어심으로 신돈을 제거했고 이는 불안한 민심을 낳아 버렸다.

이러한 불안한 민심은 곧 분노와 혼돈으로 인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는 곧 고려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나라님의 뜻을 반한 역적이 돼 처형당한 신돈을 보고 그의 추종세력들의 분노와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돈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할 수 없던 시국에 그들은 용호석 이야기를 통해 전란 중에 자기 묏자리를 만드는 어딘가 모순적인 인물로 공민왕을 표현했으며 풍수지리를 통해 나라가 망해도 자기 후대의 안위를 살피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나라의 미륵으로 지상정토를 약속한 신돈이 내재돼 있으며 이를 죽인 공민왕에 대한 회한과 조롱 또한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추측과 전설을 통해 구성된 검증 안 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 훗날 역사적 자료가 발견돼 사실로 인정받을 수도 있고 그러지 못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용호석 자체의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이후에 연구되고 발견될 새로운 금산역사의 중요한 효시의 역할 또한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용호석에 관한 역사연구가 활발히 이뤄져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잇는 역할을 해 먼 미래로 가는 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