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8 논산훈련소
대한민국 남자들 영웅담의 스테디셀러 ‘군대’… 그 중심에 자리한 육군 논산훈련소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휘호 ‘연무대’가 지명으로… 6·25전란 중 생겨 올해로 68돌
자는 곳도 먹는 것도 상전벽해… 제20대 훈련소장 정봉욱, 훈련소 자리매김 공로 커

▲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군대는 한참 젊음이 피어 날 때 꼭 겪어야 할 인생의 과정이다. 특히 그 추억 속에는 육군 논산훈련소가 있다. 사진은 각개전투훈련 중 철조망을 통과하는 훈련병 모습. 육군훈련소 제공
▲ 1960년대 육군훈련소 면회 풍경. 육군훈련소 제공
▲ 전속을 앞두고 분대장을 헹가래치는 훈련병들. 육군훈련소 제공
▲ 1976년 당시 입영장정들 모습. 육군훈련소 제공

대한민국 남성들의 특징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이야기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성들에게 군대는 한참 젊음이 피어날 때 꼭 겪어야 할 인생의 과정이며 그래서 훈련소는 모태(母胎)와 같은 것.

그 추억 속에 육군 논산훈련소가 있다.

훈련소가 위치하고 있는 논산시 연무읍, 그 '연무읍'은 원래 지명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11월 1일 육군 제2훈련소가 설치되면서 훈련소 명칭을 '연무대(鍊武臺)'라 했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붓을 들어 '연무대'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지역 명칭도 '연무읍'으로 탄생했다. 군의 기초훈련, 사격, 총검술, 화생방, 야간 행군, 수류탄 투척 등 군인으로서의 전투능력을 연마한다는 뜻.

6·25전란 중에 맨 먼저 생긴 훈련소는 제주도 모슬길에 있어 제1훈련소가 했고, 연무읍에 제2훈련소가 설치되면서 사실상 육군 신병교육은 이곳으로 일원화됐다. 올해로 68주년, 그동안 이곳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으로 탄생한 인원이 무려 900만명에 이른다. 그 900만명이 외쳐온 고함소리와 달리는 군화 발자욱 소리, 쉴새 없이 터지는 총성이 있었기에 이 나라 안보는 튼튼했고 어떤 침략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초창기 훈련소는 시설이 매우 낙후돼 있었고 식사, 장비 등이 제대로 갖추질 못했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지붕이 없는 재래식이어서 앉아 볼일을 보면 누군가 뒤에서 모자를 벗겨 달아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휴전이 되고 경제발전이 되면서 화장실은 물론 샤워장 등 모든 시설이 현대화됐고 급식도 영양체계에 충분할 만큼 개선됐다. 튼튼한 군을 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논산 훈련소는 그 중요성에 따라 역대 훈련소장들도 유능한 장군을 배치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박병권 육군소장을 비롯 훗날 육군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에 오른 사람이 많다.

특히 역대 소장들 가운데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장군도 있다. 제20대 논산훈련소장, 정봉욱(鄭鳳旭) 육군 소장. 그는 원래 북한군 중좌였다. 북한 출신으로 해방이 되자 김일성과 함께 러시아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북한군 포병 중좌가 되었으며 6·25 남침때 대좌(우리 대령급)로 참전했다.

특히 그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대구를 함락하기 위해 분투했으며 우리 국군과 미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만약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상상하기도 두려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정봉욱은 휘하 참모들을 설득해 대대병력을 이끌고 우리 국군에 귀순을 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 국군과 미군을 괴롭히던 북한군 포사격 진지의 위치를 파악해 이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정봉욱은 즉시 국군에 편입됐으며 육군 소장으로까지 승진, 7사단장, 3군 사관학교 초대 교장, 육군 논산훈련소장을 역임하다 지난해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국방일보 참조). 그는 논산훈련소 소장 때 내부의 비리를 일소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훈련병들의 훈련 강도를 높여 유사시 '백전백승'의 전투력을 갖추도록 했다.

대한민국 육군의 심장 논산 훈련소- 지금도 연병장을 달리는 장병들의 군가소리가 믿음직 하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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