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시절 두밀(杜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검소하고 청렴한 관리로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잘 어루만져 주어 칭송을 받았다. 대군(代郡)태수로 출발한 그는 태산(泰山)태수, 북해(北海)태수 등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는데 당시 나이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들의 압력에도 전혀 굽히지 않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적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지방의 하급관리에 불과했던 정현(鄭玄)도 두밀이 발탁해 후한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 두밀은 그 후 나이가 들어 벼슬길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양성으로 돌아가서도 유능한 인재를 보면 고을 군수나 현령에게 추천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처벌을 요구하는 등 정사(政事)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같은 시절 두밀과 동향인 유승(劉勝)이라는 사람도 촉군(蜀郡)의 태수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는 두밀과는 대조적으로 정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집에서 시서(詩書)를 즐기며 은거(隱居)했다.

어느 날 고을의 태수인 왕욱(王昱)을 만난 자리에서 유승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왕욱이 두밀에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유승을 고결하고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이 자자하던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말은 정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승에 비해,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훈수를 하는 두밀을 빗대서 한 말이었다. 그 말에 두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유승은 퇴임 후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고 집 안에 틀어 박혀 자신만의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추구하고 있소. 그는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만나도 나라에 천거하는 일이 없고,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를 보고도 추위에 떨고 있는 매미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을 관리로 일한 공인(公人)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오.”

두밀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확인한 왕욱은 자신의 짧은 소견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부터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공인으로서의 참다운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말이다.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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