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조(趙)나라를 대표하는 명장 조사(趙奢)에게 조괄(趙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일고 총명해 병법의 이론만큼은 아버지를 능가한다며 많은 사람의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 조사는 괄이 이론만 알뿐 실전 경험이 전혀 없으며 천성이 오만하고 경솔한 것을 몹시 걱정해 죽기 전 부인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괄이 조나라의 장수가 된다면 나라를 망칠 놈이니 그가 장수로 기용되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오.” 그 후 조사가 죽자 진(秦)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러나 백전노장 염파(廉頗)의 노련한 방어 작전에 진나라 군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진나라는 염파가 조나라 장수로 있는 한 승리가 어려움을 깨닫고 조나라에 첩자를 보내 헛소문을 퍼뜨렸다. “진나라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비겁하게 싸움을 피하는 늙은 염파가 아니라 조사의 아들 조괄이 조나라의 장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을 곧 이들은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은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그 자리에 기용하려 했다. 그러자 이낭여(藺相如)가 극구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조괄의 명성만을 믿고 장수로 임명하시면 마치 거문고의 까치발을 아교로 고정시켜 놓고 탄주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병서만 읽었을 뿐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동하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하는 위인입니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조나라의 장소가 된 조괄은 장평 전투에서 적장 백기(白起)의 계략에 빠져 40여 만의 장병을 잃고 자신도 전사해 조나라를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교주고슬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일을 꾸려 나가려는 우둔함 또는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함을 이르는 말. 거문고 줄을 지탱하는 기둥을 아교로 붙여 연주는 것은 기타 줄을 풀로 붙여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일을 꾸려 나가려는 방법으로 일을 꾸려 나가려는 우둔함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모든 일에는 신중함의 논리가 있으므로 교주고슬 하지 않도록 계획과 일처리를 해 충실한 결실이 되도록 해 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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