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며칠 전 필자는 충북 제천의 한 산을 거닐며 숲해설가로부터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숲에 있는 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을 설명하다 문득 한 소나무 앞에 발을 멈추었다.

100년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일 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였는데, 배꼽 정도의 높이에 브이(V)자 모양으로 껍질이 벗겨져 있는 것이 특이했다.

해설가는 이것을 가리키며 “일본이 강점기 시절에 전투기나 각종 무기의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려고 남긴 상처”라고 말한다. 광복된 지 75년이나 되어가는데 소나무의 상처는 아직도 제대로 아물지도 못한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둘러보니 조금 큰 소나무는 죄다 같은 모양의 상흔을 갖고 있었다. 한 나라의 고통이 사람뿐 아니라 식물조차도 괴롭게 한 것이다. 몇 달 전부터 광풍처럼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재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만행을 옛날이야기처럼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100년 가까이 이 나라의 산하를 지켜온 소나무들은 상처받은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재는 우리 국민 모두가 소재부품장비산업이 국가의 기술적 독립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를 각성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이후 정부부처의 과감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추진했고, 소재부품장비산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들이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들도 국가 연구실로 지정되어 관련 원천기술 개발과 조기 상용화를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또 국회에서는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안정적이고 집중적으로 재정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재정법일부개정법률과 소재부품장비특별법이 최종 의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앞에 당면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일본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기술력을 불과 몇 년의 투자만으로 따라잡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생산현장에 직접 투입가능한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또 험난한 신뢰성 검증이 필요하고, 시장에서 경쟁하는 과정에서 가격경쟁을 이겨 내야한다.

일반 소비재처럼 대량 생산을 통해 원가하락 요인이라도 기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소재부품장비들은 전 세계시장을 통틀어봐야 시장규모가 크지 않아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후방산업성장에 파급력이 큰 핵심소재부품장비에 대해서는 국가차원의 중장기적 투자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도 기존의 경쟁방식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제4차산업혁명은 바로 이러한 경쟁방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로봇 등으로 대표되는 제4차산업혁명의 주요 기술들은 모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보니 기존의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관련 기술들의 축적 기간이 우리와 별반 차이나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소재나 부품·장비들도 새로운 산업환경에 맞게 개발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앞서서 제품을 개발해 나간다면 이 분야에서는 새롭게 경쟁패러다임을 만들며 시장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

마치 브라운관 TV 시대에는 결코 일본의 소니를 못 따라갈 것만 같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LCD/LED TV시대를 개척하며 새로운 TV시대를 열어 경쟁을 압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소재부품장비산업에 있어서도 기존의 산업구조 하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4차산업혁명의 산업구조하에서 새롭게 등장할 소재부품장비를 선도적으로 개발하여 나간다면 머지않아 진정한 기술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재부품장비산업이 제4차산업혁명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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