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春秋時代) 남방의 강대국 초(楚)나라가 송(宋)나라를 침범했다. 그러자 중원(中原)의 맹주(盟主) 진문공(晉文公)은 초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출전해 성복이라는 곳에서 초나라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진(秦)나라와 제(齊)나라의 연합군까지 합세했음에도 군사의 수는 초나라에 비해 열세였다. 진문공은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고심하다가 심복인 호언(狐偃)에게 물었다.

“초나라의 병력이 아군보다 훨씬 많은데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호언이 대답했다. “신(臣)이 듣기로는 예절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속임수를 한번 써보십시오.”

호언이 상세한 계책을 설명하고 나간 뒤, 진문공은 다시 옹계(雍季)를 불러 호언의 계책을 말해 주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옹계는 속임수를 써서 승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었으므로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 물고기를 잡으면(갈택이어:竭澤而漁)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 불을 질러 숲 속을 모두 태워 짐승을 잡으려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잡을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별다른 방법이 없어 속인수를 쓸 수밖에 없지만 먼 장래를 위한 계책은 아니니,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이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자리에서 진문공은 뜻밖에도 이번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계책을 낸 호언보다 옹계의 공을 더 높이 평가했다. 이에 모든 신하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자 문공이 말했다. “옹계의 계책은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한 계책이고, 호언의 계책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인 방책이 어찌 백년대계(百年大計)보다 중하겠는가?”

이처럼 지혜로운 진문공은 성복대전의 승리를 계기로 명실 공히 패자(覇者)의 지위를 확보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그를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우리들도 삶에서 임시방편 보다 후일의 영원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노력해 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