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슬픈, 평화…보령 오천항(갈매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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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평화…보령 오천항(갈매못)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11월 28일 19시 0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29일 금요일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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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5 보령 오천항(갈매못)
서해안의 숨겨진 보물, 보령 오천항
백제·조선 요충지… 지금은 낚시명소
순교 역사도… 갈매못성지 성당으로 기려
▲ 충청수영성 전경. 보령시 제공
▲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갈매못성지 성당 내 기념비. 보령시 제공
▲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갈매못성지 성당. 보령시 제공
▲ 보령 오천수영성의 영보정. 보령시 제공

'갈매못'이라 일컫는 오천항은 서해안의 숨겨진 보물 같다. 그렇게 해안 풍경이 아름답고,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풍부한 수산물이 집산을 이루기 때문이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초겨울 스산한 날씨인데도 벌써 부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바다 낚시꾼들로 붐빈다.

원래 이곳은 백제 때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중요한 항구역할을 했으며 고려 때는 서해안으로 침투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군선(軍船)을 배치했을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1210년(중종5년)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본격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 서울로 항해하는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해 오천성(사적 501호)을 구축했다.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며 서해 바다를 지키는 요새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성에 4개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화강암의 돌을 아치형으로 세운 성 출입구 명화문과 망화문, 진휼청이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대비해 야옥을 저장해 두던 곳. 충남 주요 문화재 412호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건축양식이다. 병영안에 이렇듯 양곡을 저장해 둔 것은 왜구로부터의 침탈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진휼청에서 오천항을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한 눈에 시원스레 펼쳐진다. 해운(海運)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매우 요충지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많은 낚시배를 보노라면 이곳 오천항을 레저 관광지로 적극 개발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스럽다.

이처럼 평화스런 곳에서 1866년 3월 30일 소위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다블리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로 신부와 신자 황석두, 장주기 등 5명이 처형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다블리 주교는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돼 조선에 들어와 당진 신리에 기거하며 선교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다른 두 프랑스 신부, 그리고 신도 두 사람도 함께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즉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때마침 궁중에 혼사가 있어 서울을 떠나 사형집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 오천의 충청 수영으로 이송된 것.

이들은 바닷가 백사장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에 처해졌다. 중죄인의 목을 베어 머리를 높이 매달게 하는 형으로 김대건 신부도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먼 이국 땅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다 안타깝게도 효수형을 당하게 된 이들 프랑스 사제들은 망나니의 칼 춤 앞에서도 당당했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이곳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갈매못성지 성당과 기념관을 지었는데 해마다 4만-5만명의 순례객들이 찾아 올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이 성지 성당은 중앙에 설치된 대형 스테인드그라스가 유명하다. 그야말로 빛의 찬란한 색채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미사가 끝나면 이 창을 활짝 열어 젖히는데 그러면 확 트인 바다와 백사장이 시야에 다가 온다. 바로 153년전 다블리 주교와 젊은 세 명의 프랑스 신부 그리고 평신도 두 명이 피 흘리며 순교했던 백사장이다.

지난해에는 여기서 순교한 프랑스 신부의 고향 사람들 200여 명이 특별히 이곳을 찾아 왔다. 그들은 효수형을 당한 백사장을 둘러보다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더러는 눈물을 흘리기도…. 그렇게 한 시대의 비극적 역사 현장은 살아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