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향수’ 정지용 시인 1927년 3월 발표
절제된 언어에 식민 슬픔 담아…세월 흐르며 옥천 상징 언어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중략)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시 그리고 가곡무대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노래 '향수'(鄕愁)는 1927년 3월 발표된 정지용(鄭芝溶)의 대표작이다.

고향에 대한 질박하고 절제된 언어로 그리움을 토로했지만 일제 식민통치가 최고에 달할 때여서 나라 잃은 슬픔이 마디마디 녹아 흐르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이 시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의 고향은 '향수'에 나오는 그대로 실개천이 흐르고 얼룩배기 황소가 한가로이 우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인데 지금은 주소가 바뀌어 옥천읍 향수길 56번지다.

길 이름도 향수이고 이곳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으레 '향수'라는 이름이 안 들어가는 것이 없다. 그렇게 '향수'는 옥천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높지는 않지만 영험스런 국수봉 산자락 아래 교동저수지가 있고 그 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다.

정지용 생가. 사진=옥천군 제공
정지용 생가. 사진=옥천군 제공

여기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있는데 육 여사의 생가는 99칸 대저택 한옥인데 비해 정지용 시인의 생가는 소박한 초가집이다.

담벼락 옆에 늘어선 장독대와 툇마루, 청국장이 보글보글 끓는 것 같은 부엌, 마당 한쪽에 피어 있는 맨드라미와 채송화… 정말 이렇게 시인의 집은 그저 정겹기만 하다.

그래도 1996년 이곳에 '정지용 문학관'이 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인의 내면을 접할 수 있게 해 다행이다. 이 문학관에는 전시실,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잘 갖춰졌고 이곳에서 자주 시 낭송회와 문학 모임이 열려 그 기능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전국적인 행사도 열려 '국민 시인'으로 그의 정신과 생애를 반추하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 한약상을 하는 정태국을 아버지로 해 1902년 6월 20일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의 영세명은 프란치스코. 이곳 옥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지를 편집하고 글을 발표하는 등 문학 활동을 했으며 1922년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혜택을 입었다.

일본에서 그는 더욱 문학 활동을 전개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나라를 잃은 아픔이 그의 시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는 1929년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등학교, 1945년에는 이화여대 강단에 섰다가 1950년 6·25가 터지자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한동안 월북작가로 알려져 그의 모든 작품이 금지됐었다. 그러다 1950년 9월 북으로 끌려 가는 중 미군의 공습으로 의정부 부근에서 사망한 것이 밝혀져 1988년 해금됐으며 1989년에는 '정지용 문학상'까지 제정돼 박두진 시인이 제1회 수상을 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가 정지용에서 시작됐다', '현대시의 개척자' 등 찬사를 받는 정지용과 그의 '향수'는 오늘 모든 사람의 정신적 위안이 되고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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