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4 만해 韓龍雲
변절자 최린이 준 돈봉투 거절
서울 심우장, 총독부 피해 북향으로
식량난 심각… 日 식량배급도 거부

▲ 한용운 생가지 전경. 홍성군 제공
▲ 만해 사당. 홍성군 제공
▲ 만해문학체험관. 홍성군 제공
▲ 한용운 생가지 이낙연 총리 방문 모습. 홍성군 제공
▲ 한용운 생가 내부 모습. 홍성군 제공
▲ 만해문학체험관 내부 모습. 홍성군 제공
▲ 만해 한용운 동상. 홍성군 제공
▲ 만해 한용운 초상. 홍성군 제공

한용훈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어느 날 최린이 찾아 왔다. 최린도 한용운과 함께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으나 변절해 일제에 붙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한때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만해 한용운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돈 봉투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나는 민족반역자를 만나지 않겠다'며 최린을 쫓아 버렸다. 그러자 최린은 돈 봉투를 한용운의 딸에게 맡기고 돌아갔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한용운은 돈 봉투를 그대로 들고 최린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최린 앞에 돈 봉투를 집어 던지고 돌아왔다.

이 일화는 한용운의 불같은 애국심과 정의감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심우장을 처음 지을 때도 마땅히 남향을 향해야 하는데 북향을 향해 집을 지었다. 남쪽으로 향하면 좋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그는 일본을 미워했다. 딸을 낳았는데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는데 이 역시 일본 국적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학교도 입학할 수 없었다.

일제말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식량난이 심각했고 한용운 역시 고통이 컸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배급을 실시했는데 한용운은 배고파 죽을지언정 일본이 주는 것은 먹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배급을 거부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 해방 1년을 앞두고 1944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독립선언 33인중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일 투쟁에 일생을 바친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에는 생가와 함께 만해 문학체험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을 에워싼 소나무 숲과 산세가 한 시대 위대한 인물의 혼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문학체험관은 그 내용이 만해의 생애별로 알기 쉽게 전개돼 있어 어린이에서부터 어른, 외국인, 누구든 그의 발자취에 깊이 빠져 들게 한다.

한용운은 어려서 서당을 다녔는데 모든 과정을 빠르게 마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1894년 동학혁명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그냥 시골에 묻혀 있을 수만 없다는 결심을 하고 1896년 17세 나이에 출가를 결행한다.

집을 나온 그는 금강산 오세암에 머물다 홀연히 시베리아 여행을 떠난다. 눈 덮인 시베리아의 끝없는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며 민족과 불교 그리고 많은 시상에 잠기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 온 한용운은 1905년 백담사에 들어가 마침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된다.

이 때 받은 법호가 '만해'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한 승려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부패에 빠진 불교의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불교 유신론을 내걸고 불교의 대중화를 외쳤으며 이에 호응하는 승려들을 모아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면서 300여 편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26년에 발표된 '님의 침묵'이다.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그가 애틋이 부르짖은 '님'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 아닐까.

3·1운동 때 그는 33인을 대표하여 종로 태화관에서 연설을 하면서 우리 모두 일본 경찰에 구속되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말고, 보석신청을 하지 않으며, 사식(私食)을 먹지 말자고 했는데 그것을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불같은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시를 쓰며 불교 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친 한용운-우리 자랑스런 '행동하는 충청인'이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