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발에 무언가 툭 차인다. 도로에 버려진 음료수 캔 깡통이다. 빈 깡통은 무시로 달리는 자동차에 치이든가, 아니면 음료수를 먹은 주인의 발에 무자비하게 짓눌렸든가. 심히 납작하다.

밝은 주황색 바탕에 물 흐르듯 세로줄 검정 무늬의 깡통을 보는 순간 작가의 뇌리에 번쩍 스치는 것이 있다. 바로 J 여인을 연상한 한명철 나무 조각가의 엽엽한 작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상은 작품의 재료가 되리라. 작품 ‘눌린 여자’는 짓눌린 캔 깡통을 몸통으로 두 다리는 나뭇가지로 실로 엮고 두 팔은 헝겊으로 덧댄듯하다. 그러니까 나무 인형의 재료는 버려진 빈 깡통과 나뭇가지, 바닷가에서 주운 나무토막, 잔돌과 실 등이다. 나무 인형은 눈짐작으로 약 이십센티가 넘을 듯싶다. 그의 시선에 무언가 들어오면, 숨죽은 이야기도 되살아나리라.

도로에 버려진 빈 깡통도 세상에 단 하나의 멋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예술가이다.

나무 인형은 금방이라도 뒤로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다. 왼발로 온몸을 지탱하는 인형의 자태가 범상치가 않다.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서 있는 이유를 묻자,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 여인의 삶을 술술 풀어놓는다. 여자의 외롭고 기구한 삶이 작가의 마음을 흔든 것일까. 바닥에 짓눌린 깡통은 그의 뇌리에 번뜩이는 영감으로 노처녀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독신으로 머물다 느지막이 시집간 여자의 일화, ‘눌린 여자’가 대변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년 시절 산책을 위한 명목으로 종종 자신을 동반한다. 사실은 외간 여자를 만나러 둑으로 데리고 나간 것이다. 몽매한 아버지는 당신의 비밀이 감춰질 줄 알았던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라는 소문을 모르는 바보이다. 소문의 본거지에 함께한 딸은 어찌 살아가랴.

아버지의 외도는 딸을 독신으로 머물게 한다. 어쩌다 마흔다섯에 후처로 시집을 가나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의 밥 세 끼 차리는 여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녀에게 남자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몹쓸 바람과 남편의 밥 타령으로 점철되는가. 여인의 삶이 안타까운 조각가는 나무 인형에 그 남자를 발로 '뻥' 차 버리고 싶은 여자의 심정을 담는다.

나무 인형에서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피어난다. 작품마다 서글프고 녹록하지 않은 삶이 배여 있다. 작품에 스토리가 있다는 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이웃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조각가는 40년 이상 나무로 인형을 만들며 인간의 마음결과 나뭇결을 다스리고 있다. 한 작품이 완성하기까지는 적어도 십 년이 걸린단다.

작업 공간을 드나들며 기발한 착상이 더해지고 나무의 결을 매만져야 완성된 인형이 된다고 말한다. 물상의 결을 깨우친 작가이다. 일상이 예술로 승화하는 남다른 장인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나무 인형 '눌린 여자'를 매만지며 그녀의 삶에 숨통을 트는 중이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여자가 아니다. 어떤 억압도 구속도 없다. 한명철 나무 조각가의 치밀한 구성과 조각의 ‘눌린 여자’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는 작은 거구의 남자여, 조심하길. 어느 순간 지구 밖으로 퇴출당할지 모른다. 그동안 숨죽이고 산 발길질 잘하는 그녀가 기다린다.

가끔은 나무 인형처럼 세상을 비스듬히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독특한 작품을 보는 순간 치명적 변신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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