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속리산 상환암 공양주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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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속리산 상환암 공양주 보살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11월 07일 18시 5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08일 금요일
  •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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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억수 시인

가을이다.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의 색깔로 깊어 간다. 가을 햇살이 나에게 일상을 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라고 유혹한다. 가을의 안달에 속리산을 향했다.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속리산의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진표율사가 불상을 싣고 이곳을 지나자 밭을 갈던 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소들도 알아보는 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그 길로 율사를 따라 입산수도했다. 이때부터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수행했다는 데서 속리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속세를 떠난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가며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에 들어섰다. 일상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보아서인지 산자락마다 곱게 단장한 나무들이 가을 햇빛을 머금어 찬란하다. 법주사 경내로 향하는 길과 세조 길이 시작되는 갈래 길에서 세조 길을 택했다. 세조 길은 산책로가 잘 조성돼 세심정까지 힘들이지 않고 여유롭게 걸었다. 세심정 갈래 길에서 발길을 상환암으로 향했다.

상환암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직전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태조의 전설이 깃든 상환암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설렘으로 분주하다. 상환암 가는 길은 고행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힘겹게 오르는 것만은 아니다. 거대한 바위와 울창한 숲 사이의 소로에 들어서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을 햇살이 천 길 암벽을 타고 내려와 산자락을 무지개 색깔로 울긋불긋 물감 칠을 해놓았다. 곱게 단장한 나무들 사이의 돌계단 길을 오르다 보면 데크로 만든 계단 길을 만난다. 계단에는 상환암을 찾은 불자들의 마음 글이 적혀있다.

마음 글이 적혀있는 계단을 오르며 나를 돌아본다. 나의 길은 늘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언덕도 만났고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어떤 날은 갈림길에서 방황하기도 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참으로 멀리도 걸었다. 구불구불 내가 지나온 길이 이제는 아름답게 보인다. 그저 걷기에 바쁜 나는 어쩌면 지나오면서 하늘 한번, 숲 한번 바라보지 못한 것 같다. 돌이켜 보니 길은 늘 아름다운 계절을 간직하고 있었다. 늦은 가을 길을 걷는 나이가 돼서야 아! 봄도 아름다웠고 여름도 활기찼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자들이 남긴 마음 글을 읽으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마음이 평화롭다. 비탈진 조그만 채마밭에서 백발의 공양주 보살이 환한 미소로 반긴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바위산 중턱에 자리한 상환암이 오묘하다. 상환암을 품은 학소대의 위상이 부처의 모습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한량없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마음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외할머니의 윤회가 나를 상환암으로 인도했나 보다. 백발이셨던 외할머니가 상환암 공양주 보살로 환생하셨는지 자꾸만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