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칼끝은 왜 이곳을 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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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칼끝은 왜 이곳을 향했을까?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10월 31일 18시 16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01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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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1 槐山 화양계곡과 宋時烈
대원군 유랑생활 때 만동묘 방문… 경비원에 걷어차이는 수모 겪어
집권 후 서원철폐령… 적폐청산 첫 대상으로 화양서원·만동묘 지목
▲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릴 때 첫 대상이 된 만동묘. 이곳이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의 정치중심지로 그 세가 굉장했다. 괴산군 제공
▲ 송시열이 사랑한 화양계곡. 괴산군 제공
▲ 송시열이 효종이 세상을 떠난 후 엎드려 통곡한 것으로 전해지는 읍궁암. 괴산군 제공
▲ 전국에서 모여든 사림들로 북적였던 화양서원. 괴산군 제공

대원군이 유랑생활을 할 때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를 찾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은 아름다운 경치도 볼 겸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화양서원과 그 안에 있는 만동묘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는 것.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왜적을 물리치게 한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의 ‘은혜’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사당.

대원군이 이런 뜻을 지닌 만동묘를 참배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경비원이 뛰어와 대원군을 발로 걷어찼다. 대원군은 순식간에 나뒹굴고 말았다. “여기는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는 엄위한 곳이라 우리 임금도 머리를 숙여 발걸음을 옮기는 데 네가 감히 어디서 머리를 꽂꽂이 세우고 올라 오느냐”라는 것이다. 이런 수모를 당한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서원 철폐령을 내릴 때 이곳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첫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적폐청산’이 된 셈이다.

이렇듯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대원군도 걷어 찰 만큼 그 세가 굉장했다. 우암 송시열의 노론이 절대적 권력을 쥐고 있었고 따라서 이곳이 노론의 정치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양서원은 전국에서 모여 든 사림들로 늘 북적였다.

우암 송시열은 이곳 8㎞나 되는 긴 계곡과 기암괴석, 맑은 물, 절벽에 뿌리를 박고 있는 소나무 숲을 무척 사랑했다. 1659년 우암과 의기투합해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서 그 소식을 듣고 우암이 바위에 활처럼 엎드려 통곡을 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그 바위를 ‘읍궁암’이라 부른다.

1670년에는 우의정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화양동으로 내려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때 그는 이곳 암벽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공자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중국 황하강 물줄기는 수없이 굴곡을 지나지만 끝내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 즉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의로운 목표를 저버리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충신의 절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지난 번 문희상 국회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이 글을 액자로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우암은 1674년 화양동에서 나와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됐는데 효종비가 세상을 떠나자 예송에 휘말리게 됐다.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인데 1차 예송 때는 우암의 서인이 이겼지만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이 이김으로써 우암은 파직을 당하게 되고 1675년(숙종 1년)에는 덕원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1680년 ‘경신환국’이라 하여 남인이 퇴각하고 서인이 집권을 했는데 1689년 예기치 않은 원자책봉문제로 서인이 다시 몰락하게 된다.

숙종이 장희빈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우암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 화근. 결국 우암은 1689년 1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돼 오다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이 내려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권상하 등 우암의 제자들이 이곳에 서원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일제 때는 제사 지내는 것이 통제됐고 ‘만동묘’의 사연을 새긴 묘정비는 글자를 징으로 쪼아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가 군대를 보내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이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죽령과 소백산맥을 넘어온 아홉 구비의 계곡 그래서 화양 구곡(九谷)이라 불리는 변화무쌍한 암석의 이 계곡에는 지금도 역사가 물안개처럼 피어난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