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양(鄒陽)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양(梁)나라에 놀러갔다가 오(吳)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 회음(淮陰) 사람 매생(枚生)과 같은 명사들과 교우를 맺었다.

사람됨이 지혜롭고 재략이 있었으며, 성격이 강개해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추양(鄒陽)이 글을 올려 당시 양효왕(梁孝王)의 문객으로 있던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의 무리에 혼자 힘으로 낄 수 있었다. 양승(羊勝) 등이 추양(鄒陽)을 시기해 양효왕(梁孝王)의 면전에서 그를 모함했다. 분노한 효왕(孝王)이 추양(鄒陽)을 관리들에게 넘겨 죄를 물어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추양(鄒陽)은 양(梁)나라에 놀러왔다가 참언을 받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면 명성에 누가 될 까봐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효왕(孝王)에게 올렸다(獄中上梁王書).

“충성은 보답을 받지 못함이 없고 믿음은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형가(荊軻)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협심을 존경했지만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고 침범하자 태자가 형가(荊軻)를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신은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대왕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랐으나 대왕의 좌우가 밝지 못해 오히려 옥리에게 심문을 당하고 세상의 의심을 받게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변화(卞和)는 보옥의 원석을 초왕(楚王)에게 바쳤지만 초왕(楚王)은 오히려 변화(卞和)를 월형에 처했으며,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했지만 제2세 황제 호해(胡亥)는 그를 극형에 처했다.

“속담에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교제하더라도 마음이 안 통하면 새로 사귄 사람과 같고, 첫 만남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양(梁)나라 왕은 이 글을 읽고 감동해 그를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상객으로 맞이해 후히 대접했다.

‘백두여신(白頭如新)’은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오래 사귄 친구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새로 사귄 친구처럼 소원하다는 말이고, ‘경개여고(傾蓋如故)’는 수레를 타고 가다 멈추어 수레 덮개를 기울여 가까이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처럼,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잘 통하는 것을 말한다.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