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10월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맑고 청아한 가을 하늘과 더운 여름을 잊게 하는 코끝의 선선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필자가 태어난 생일이 있기 때문이다.

생일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유한 나를 다시 확인하고픈 시간이다. 게다가 특별 이벤트로 물들이고픈 내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고 싶은 시간임은 분명한 것 같다.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착각 속에 있더라도 굳이 겸손을 떨 필요가 없는 날. 올해도 변함없이 아이들과 아내는 욕망과 착각 속에 빠져있는 필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 밥상을 멀리 하고 옹기종기 식탁에 둘러앉는다.

먼저 한글을 배운 첫째 아이가 직접 쓴 삐뚤빼뚤 손편지를 내놓는다. 거기엔 사랑과 고마움이 듬뿍 담겨있다. 둘째 아이는 그림 스티커와 함께 며칠 전 필자로부터 가져간 출처 불명의 수첩 하나를 비닐에 담아 선물이라며 되돌려준다. 평소 아빠의 메모하는 습관을 유심히 살폈나보다. 네 살 된 막내는 선물은커녕 생일 축하 파티가 한시라도 빨리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엄마 손에 들려진 케이크를 보는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케크, 케크'를 연달아 내뱉는다.

케이크에 꽂아진 초를 본 둘째 아이는 벌써부터 박수칠 준비를 한다. 큰 아이는 동생들이 크림 위 초콜릿에 손이라도 댈까 싶어 유심히 살피다가 손끝이 닿는 순간 맏이 노릇이라도 하려는 듯 이름을 크게 부르며 말린다. 기다란 초 네 개를 케이크 상단에 꽂는데 서툰 막내의 솜씨에 하나가 부러진다. 그래도 다시 자기가 꼽겠다고 난리를 친다. 아내는 왜 네 개의 초를 준비했을까. 하루라도 젊게 살자는 아내의 깊은 배려로 받아들인다면 이것도 착각일가 싶어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마자 세 아이는 서로 달려들어 촛불을 '후'하고 꺼버린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막내가 제대로 불지 못했다며 다시 해 달라고 떼를 쓴다. 아무래도 화기애애한 축하 분위기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 초에 다시 불을 붙인다. 그러나 끄는 과정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사실 생일 축하 시간의 최고조는 촛불을 끄는 순간이고 그 대미를 장식할 주인공은 생일 당사자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항상 그렇듯 자신이 마치 주인공이듯 유난을 떤다. 이번 생일에는 꼭 아빠가 불어서 끄겠다고 아이들에게 미리 으름장을 놓았건만 어김없이 그 순간뿐인 것 같다. 촛불을 보는 순간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간적인 충동에 아주 충실해진다.

촛불은 예전만큼 여러 번 불지 않아도 이젠 한두 번 만에 사라지는 것을 본다. 옆에서 도와주어야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라면서 조금씩 더 강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생일의 주인공이 아니면 어떤가. 잘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잠시 동안 스스로를 달랜다.

갑자기 아이들이 칼을 직접 건네주면서 케이크를 빨리 잘라달라고 조른다. 주인공으로 다시 등극하는 순간이다. 그 마음만이라도 고맙게 여기고 케이크를 자르는데 자르기가 무섭게 서로 달라고 난리다. 아무리 급해도 '아빠엄마 먼저 드세요' 라는 말을 누구라도 한 번쯤 해주면 좋으련만, 더욱이 생일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칼자루를 필자에게 건넨 건 한시라도 빨리 먹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주인공 예우차원은 아닌 듯하다. 반복되는 착각에 그냥 피식 웃고 만다.

케이크 조각을 차례차례 나눠주는데 이번에는 왜 동생만 많이 주냐고 불평한다. 몇 개 안되는 크림 위 딸기 때문에 서로 언쟁이 오가는 순간, 말이 서툰 막내는 자신만의 필살기인 소리 지르기로 맞선다. 빵 속에 들어있는 다른 딸기로 유인해도 한번 눈에 들어온 딸기에만 집중한다. 크림 위 초콜릿은 이미 손으로 집어 먹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생일 파티가 끝나갈 즈음, 화려하고 정교했던 생일 케이크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남은 조각들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잔재들만이 상 위와 바닥을 수놓는다. 깨끗이 다 먹지도 않으면서 유난을 떨던 모습이 아쉽고, 버려지는 잔재들에 미안함이 감돈다. 앞으로 생일 파티 케이크는 크기가 좀 더 작은 것으로 준비할 것을 다짐해 본다. 아내가 뒤처리를 할 테니 쉬라고 한다. 아내 때문에 생일 파티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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