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0 조선인 충남지사 이범익
충남도청 대전 이전 이삿짐 골치
1t 넘는 금고 난제… 박수로 환영
대전·내포 거쳐 87년만에 공주로

▲ 1935년 당시 충남도청 전경
▲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큰 문제가 된 것이 무게가 1t이나 되는 철제 금고를 옮기는 것이었다. 사진은 ‘문제의’ 철제 금고.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또 하나의 문제는 이삿짐이었다. 막상 짐을 실은 화물트럭이 대전으로 출발하자 마티고개 커브 지점에 누군가 바윗돌을 쌓아서 통행이 지연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위험 지역에는 일본 경찰이 배치되어 감시에 들어갔다.

특히 철제 금고를 옮기는 게 큰 문제였다. 금고 무게가 1t이나 되기 때문에 당시 비포장 좁은 도로, 특히 꾸불꾸불한 고개를 넘는 게 매우 위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금고를 실은 트럭 뒤에 인부들을 태운 또 하나의 트럭이 따라 갔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어렵게 금고가 대전 신청사에 도착하자 직원들은 박수로 맞이했으며 우가끼 도지사는 인부들과 트럭 운전자에게 20원을 상여금으로 주었는데 그것은 쌀 두 가마 값이었다.

이 금고는 1928년 일본에 주문 제작한 것으로 공주 도청에 4년간 있다가 대전 도청에서 66년간 그리고 내포도청을 거쳐 올해 1월, 87년 만에 공주로 돌아 왔다. 돌고 돌아 충남역사문화원 박물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금고 하나에도 그만큼 역사가 배어 있기 때문.

이렇게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이 성공하자 대전 거주 일본인들의 위세가 대단히 높았다.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높은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사람이 있었다. 1935년 일본인 우가끼 지사 후임으로 충남지사에 부임한 이범익(李範益).

충북 단양 출신인 이 지사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 경찰부장 다까오와 부딪혔다. 도지사인 자신의 승용차 번호판이 '충남 관2'인데 반해 경찰부장 승용차는 '충남 관1'이었던 게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 때는 경찰부장이 도지사 지휘아래 있었다.

한 번은 다까오 경찰부장과 함께 퇴근길에 도청 현관에서 만났다. 그러자 '관2호'인 지사 승용차가 맨 앞에 대기했었고 경찰부장 차가 그 뒤에 있었는데 이범익 지사가 운전사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너는 1번, 2번 순서도 모르냐? 1번인 경찰부장 차가 먼저 떠나거든 2번인 내가 떠나야지!" 그 순간 다까오 경찰부장이 정신이 번쩍 들어 이 지사 앞에 정중히 사과를 했다. "제가 잘 못했습니다. 당장 번호판을 바꾸겠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도지사라고 무시했던 일본 경찰부장의 버릇을 고쳤다.

또 한 번은 이 지사 부인이 지금 대전역 앞에 있던 일본인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다 사건이 벌어졌다. 부인이 한복을 입고 백화점에 들러 남편이 입을 연미복을 사려고 했다. 연미복은 중요한 행사 때나 결혼식 때 입는 것인데 미나까이의 양복 판매인은 "조센징(조선인)도 연미복이 필요합니까?"하고 조롱하듯 대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범익 지사는 관계직원들을 불러 미나까이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사적인 감정을 공적 기관을 동원해 보복하는 것이지만 그는 이 기회에 대전 일본인들의 오만함을 이 기회에 꺾어야겠다는 데서 그렇게 한 것이다. 조사결과 전기회사에 납품한 물건에 불량품이 발견되는 등 몇 가지 비리가 발견되었고 따라서 미나까이 백화점에 3일간의 영업정지를 때렸다. 그러자 대전의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충남지사로서 이범익은 조선인에게 신망을 받았으나 1937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 간도성 초대 성장(省長)으로 영전을 하고부터는 만주의 항일운동을 탄압하는 등 일본에 충성을 다해 일본정부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소련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그를 체포, 중앙 아시아로 보내져 생사가 전해지지 않았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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