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학교 교수

내가 학교에서 배운 을사보호조약의 전말은 이렇다. ‘고종은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했다. 그러나 을사오적이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토)의 강압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체결했다. 따라서 그것은 국제법상으로 무효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진실일까?

을사보호조약을 비롯한 일제(日帝)의 침략과정에 대해 일본자료를 폭넓게 분석해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남긴 분은 일본 쓰쿠바대 교수를 역임한 고(故) 강동진 교수다. 그에 따르면 이토는 1905년 11월 10일 덕수궁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15일 그는 고종을 다시 만나 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외교권 이양을 강요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같은 화근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에서다. 이는 국제관례를 무시한 처사였지만 고종은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만한 국력과 배짱이 없었다. 그는 “보호조약의 내용에 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다만 외교권이 대한제국에게도 있다는 흔적만큼은 남겨달라”고 간청했다. 이토는 그의 요청을 싸늘하게 거절했다.

16일 오후 4시 이토는 참정대신 한규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법부대신 이하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탁지부대신 민영기, 원로대신 심상훈을 자기 숙소인 손탁 호텔로 불렀다. 그리고 조약체결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외부대신 박제순은 다른 곳에서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이하 하야시)와 협의를 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17일 오전 11시 한규설을 비롯한 8대신은 일본 공사관에서 하야시와 보호조약에 대해 협의했지만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이토가 자리를 비운데다 8대신들이 원론적인 반대 입장만 제기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하야시는 이재극 궁내부대신에게 고종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오후 3시 덕수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종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8대신들과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는 뻔했다. 이완용이 건의한 조약 문안에 대한 일부 자구(字句)수정과 권중현이 제안한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장하는 조항의 신설 요구만이 논의되었다.

한편 협상의 난항을 깨달은 이토는 중무장한 일본군으로 대궐을 포위한 후 밤 8시에 입궐해서 고종의 알현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에게 “이미 조정대신들에게 내 뜻을 전했으니 그대가 중간에서 타협점을 찾아보라”는 주문만 전했다. 이토가 주도한 심야회의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그는 8대신들에게 보호조약에 대한 찬반 여부를 일일이 묻고 결론까지 직접 내렸다.

그가 반대자로 지목한 사람은 한규설과 민영기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도 애원조의 허접한 반대에 불과했다. 이어 한규설과 박제순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나머지 대신들은 조약 문안을 수정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1월 18일 새벽 1시, 이토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선포했다.

단언컨대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모든 책임은 고종의 몫이다. 8대신은 가신(家臣)으로서 집주인의 명에 따라 조약체결에 임했을 따름이다. 또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에게 덧씌워진 을사오적은 잘못된 표현이며, 굳이 대신들까지 문책한다면 이재극을 포함한 9명의 대신들에게 공동책임을 묻는 게 옳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이며 정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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