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순이 눈여겨 본 대전… 로비의 중심이 된 유성 온천장
상태바
김갑순이 눈여겨 본 대전… 로비의 중심이 된 유성 온천장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10월 10일 18시 06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0월 11일 금요일
  • 8면
  • 지면보기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48 충청도 갑부 김갑순(2)
운수업 발판 부동산 거부… 대전 발전 대비 문화사업도 꾸준히 펼쳐
당시 충남 최대 사교장 유성 온천장… 日 유력거류민과 친교장소 활용
日 귀족 시라이시와 만남도… 향후 충남도청 대전 이전 결정적 역할
▲ 김갑순은 일본 유력 거류민들과의 친교장소로 자신이 세운 유성 온천장(현 유성호텔 전신)을 활용했다. 사진은 2000년 촬영한 유성호텔 모습. 대전 찰칵 제공

김갑순은 관운이 좋아 6개 군수를 역임했는데 마지막은 아산군수였다.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잠시 아산군수를 하다 사표를 내고 공주로 돌아와 부동산 매입, 황무지 개간에 심혈을 쏟았다. 6개 군수를 하면서 얻은 정보가 무기였으며 여기 저기 눈 먼 땅이 부지기수 였다. 주인 없는 땅, 국가소유이면서 공중에 떠있는 땅 등등. 그래서 그는 대전이 邑이던 1930년 대전면적의 50%를 차지하는 것을 비롯 충남에 1011만평의 부동산 거부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부동산 거부가 되는 데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 준 것은 그의 독점적 운수업이었다. 공주~대전, 대전~공주, 공주~조치원을 오고 가는 승합버스로 현금 수입이 날로 높아 졌고 마침내 서울, 대구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면서 논산에는 충남에서 처음으로 공중목욕탕을 지어 주고 공주에는 최초의 극장도 세우는 등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그의 머리 속에는 언젠가 대전이 당시로서는 인구 2만도 안 되는 촌락이지만 크게 비약할 때가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비하는 것이었다.

대전에서 목포로 가는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대전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계속 늘어 나는 것에 그는 주목했다. 그리고 대전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고 새 정보를 갖고 있는 일본 유력 거류민들과의 친교 장소로는 자신이 세운 유성 온천장(현 유성호텔 전신)을 활용했다.

당시 유성 온천장은 대전·충남지방의 최대 사교장이었다. 이 무렵 대전에 거류하는 일본인으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로는 시라이시 데즈지로, 그는 일본 본국의 귀족이었는데 여자문제로 일본에서 문제를 일으켜 대전으로 거처를 옮겨 왔고 김갑순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오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대 한반도의 정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 한반도는 일본 재벌들이 서로 진출하려는 각축전이 매우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이들이 한반도에 뜨거운 관심을 갖는 것은 광활한 만주를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압록강 수력발전소를 비롯 비료공장 등 대규모 공사가 여기 저기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눈독들인 사람은 일본 본국의 다나까 수상이다. 그는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재벌들이 좋은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자금책무를 맡겨 1927년 야마나시 전 육군대장을 조선총독으로 내보냈다. 야마나시 총독은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마침 서울 등지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들 검거에 나섰는데 박헌영, 김상룡, 조봉암, 이주하 등의 거물들이 이 때 체포됐다.

그러는 한편 정치자금 모으는데 전력을 쏟았다. 여기에 편승한 것이 대전의 일본 거류민들의 대표자 역할을 하던 시라이시와 김갑순이였다. 1929년 3월 야마나시 총독은 충남지방 시찰차 공주, 논산, 대전을 거쳐 유성에서 일박을 하게 됐다. 그날 저녁 일본 거류민들이 유성 온천장에서 환영연을 베풀었고 시라이시가 거류민을 대표하여 1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총독에게 주었다. 공주에 있는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겨 달라는 뇌물이었다. 그 당시 10만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 억대가 넘는 거금이었다. (계속)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