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초려 이유태와 성암 이철영
고주환 선선유교경전연구소 소장

변혁해야 할 때 혁신을 못한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 교훈이다. 조선 중엽 변혁의 시대에 국정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한 초려 이유태(1607~1684)와 조선의 멸망 앞에 분연히 일어나 태연자약하게 항일대의를 실천한 성암 이철영(1867~1919)이라는 분이 있다. 두 분 다 유학의 도를 실천하신 것이다. 비록 만난 시대가 달라 행위는 다르지만 실천한 도는 같다. 변혁의 시대를 만난 이유태는 혁신주의자이고, 국망의 시대를 만난 이철영은 선비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우국충정을 자신의 처지에서 실천한 보수주의자이다.

초려 이유태(1607~1684)는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임진·병자 양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내우외환의 참담한 사회였다. '망하지 않은 것이 불행'이라 말할 정도로 민생과 국정은 파탄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기득권층은 현실을 직면하여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고 정쟁만 일삼았다. 말은 비록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천이 없는 권력쟁탈의 도구에 불과했다.

초려 이유태는 이러한 시대상에 직면해 민생의 구제와 국정의 기강확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자임한 실천적 유학자이다. 그 대안으로 율곡선생의 만언봉사의 실천적 유학을 계승하여 국정전반의 개혁론인 ‘기해봉사’를 작성했다. 그가 올린 기해봉사의 말미에 ‘삼가 죽기를 무릅쓴다.’고 개혁의 절실함과 절박함을 토로하고 있다. 누가 초려의 이 절절함을 이해할 것인가? 공리주의, 이권쟁탈, 권력지상주의의 풍토로 전락한 조선의 광풍 속에서 ‘기해봉사’라는 개혁안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조선의 선비 이유태의 개혁론이 본래 유학이란 학문의 본체임을 누가 알겠는가?

"송 원풍 8년(1085)에 하남에 사는 정호 백순이 돌아가시자, 노공 문언박이 그의 묘비에 명도선생이라 쓰니 그의 아우 정이 정숙이 다음과 같이 서문을 지었다. '주공이 돌아가심에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고 맹자가 돌아가심에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으니, 도가 행해지지 않은지라 100대에 훌륭한 정치가 없고 학문이 전해지지 않은지라 천년 동안 진짜 선비가 없었으니 훌륭한 정치가 없더라도 선비가 오히려 훌륭한 정치 방법을 밝혀 사람을 가르쳐서 후대에 전할 수 있겠지만 진짜 선비가 없으면 천하가 암흑에 빠져 갈 곳을 몰라 욕망에 빠져 천리(天理)가 없어질 것이다. 선생께서 1400년 뒤에 태어나 남은 경서에서 전해지지 않은 학문을 터득해 사학(斯學)의 흥기를 자기 책임으로 삼아 이단을 분변하고 사설을 물리쳐 성인의 도를 다시 세상에 찬란히 빛나게 하셨으니, 대개 맹자 후로 한 분일뿐이다. 그러나 학자가 도에 있어서 향할 바를 모르면 누가 이 사람의 공인 줄 알며 이른 경지를 모르면 누가 이 이름(明道)이 실정에 맞는 줄을 알겠는가?'"

유학의 전성시대를 살았던 이천 선생도 "학자가 도에 있어서 향할 바를 모르면 누가 이 사람의 공인 줄 알며 이른 경지를 모르면 누가 이 이름(明道)이 실정에 맞는 줄을 알겠는가?"라고 개탄했는데,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던 조선중기, 하물며 북벌조차 잿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그 역사 속에서 누가 초려의 학문이 유학의 실천대도임을 알겠는가? 또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이 초려의 학문과 실천에 무슨 흠결이 되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不怨天不尤人)"는 것이 본래 유학의 가르침 아닌가?

어려서 배움은 장성해 실천하고자 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문의 궁극의 목적은 실천함이다. 실천이 아니라면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인류 역사에 누가 배우고 도를 깨우쳐서 하나도 흠결 없이 실천했을까? 조선에서는 누가 배운 것을 제대로 실천하려고 했나? 또 오늘의 시대는 누가 배운 것을 실천했는가? 지식이 이권쟁탈의 도구로 전락하면 진정 그 사회는 희망이 없다. 임진·병자의 양난이 어찌 우연이며 한일합방(경술국치)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지식이 이권쟁탈의 도구로 전락한 결과물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가? 성리학의 나라를 꿈꾼 삼봉 정도전의 숙청, 어떠한 사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조의 왕권찬탈, 정암 조광조의 개혁실패와 사화, 율곡의 개혁론 흐지부지, 초려의 국정전반의 개혁론 역시 흐지부지, 이후 조선은 ‘보공색하’의 땜질식 처방으로 급기야 세도정치로 이어져 민초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선의 역사 어디에서 성리학의 나라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이로 보면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문패를 내건 시정잡배의 권력쟁탈에 불과했다고 하겠다.

임진·병자의 참혹에 변란에도 반성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하며 이권밖에 모르는 시정잡배와 같은 기득권자들에게 성리학이 과연 무엇일까? 초려의 ‘기축논사소’는 바로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개혁론자와 기득권층이 부딪치며 일어난 사건이다. 김자점 일파의 청나라 밀고는 사대라는 파렴치한 행위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국에 빌붙은 것이니, 그 연원은 멀리 친당에 있으며 지금도 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습성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초려가 제시한 해결책은 ‘선내수 후북벌’의 논리이다. 부국강병이다. 참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은 실천적 대안이다. 내수가 없는 북벌은 하나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다. 내수의 핵심은 사문화된 조종의 헌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연산조의 잘못된 법규를 바로잡는 것이다. 결국 실천에 달린 셈이다. 특히 부국의 기본토대는 향촌의 안정과 민초의 교육에 달렸기에 기해봉사의 별책으로 제시한 초려의 향약은 국가적 차원에서 설계한 것이다.

초려의 개혁론은 사상의 변혁을 추구한 혁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한 조종헌장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헌법을 실천하자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정암, 율곡을 거치면서 더욱 도탄에 빠진 민생의 구제와 기득권층의 이권쟁탈로 허물어진 기강을 바로잡자는 실천론이다. 이러한 실천이 바로 조선의 유학자인 선비가 해야 할 시대적 당무인 것이다. 초려 이유태는 이를 자임한 선비로서 평소 이를 일상에서 실천한 자이다. 다음은 초려의 학문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간공 선이 당적에 연루돼 귀주로 귀양을 갔다. 이 때 이문헌공 유태가 철옹에 유배됐다. 정간공이 편지를 쓰고 아울러 백지로 책을 만들어 보내면서 ‘격언지론을 써서 조석으로 외우게 해 달라’고 했다. 문헌공이 "작은 서실을 지어 대청 방 곁에 두고 책은 상에 있고 붓과 벼루는 상 곁에 놓고 무릎 꿇고 공수하고 눈은 바르지 못한 것을 보지 않는데 두고 귀는 기울여 듣지 않는데 두고 마음은 배 속에 두며 부모는 존엄에 두고 자손은 낮음에 있으며 남자는 밖에 있고 여자는 안에 있으며 말은 마구간에 있고 소는 우리에 있으며 개는 문밖에 있고 닭은 홰대 위에 있으며 집안을 물 뿌리고 쓰는 일은 새벽에 하고 대문을 잠그는 일은 저녁에 하며 거름은 밭에 주고 김매는 일은 힘써 하며 방적은 부지런히 하고 물고기는 연못에 있으며 채소와 과일나무는 원에 있고 상마와 닥나무·옻나무는 언덕에 있으며 부모봉양은 충심에 있고 상장제례는 정성에 있으며 그릇은 검소함에 있고 음식은 담박함에 있으며 화락은 처자식과 형제에 있고 친목은 족인과 향당에 있으며 종유는 사우에 있고 천천히 보행함은 꽃과 버들 사이에 있고 흉금의 유연함은 읊조릴 때에 있고 경서는 완미함에 있고 천리는 체인함에 있으며 희노애락은 발동하여 절도에 맞음에 있고 만변수작은 확연한 대공(大公)에 있게 할 것이니, 이것이 물마다 편안하고 떳떳한 처소가 있다는 데에서 미루어 말한 것이다"라고 써서 보냈다.

초려가 제시한 격언지론은 일상의 생활이다. 초려가 시대를 만나 정치를 했다면 바로 이상의 일상의 생활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실천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의 실천이며 학문의 실천이며 성리학의 정치목적인 각득기소의 실현으로 나가는 길이다. 초려의 이러한 실천적 대의를 가학(家學)으로 면면히 계승한 성암 이철영(1867~1919)의 항일대의는 당연한 것이다. 역사는 표준을 기다려 정리된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인물의 표준을 정립함은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아울러 오늘의 시대가 자유민주주의라면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이라는 잣대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 진리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있다. 그러므로 학문과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인의예지의 본성을 누가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이 관건이라 하겠다.

초려 이유태가 임진·병자 후의 시대를 만나 개혁론을 제시했다면 그의 9세손 성암 이철영(1867~1919)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불사이군(不事二君)과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인륜도덕을 실천하였다. 두 분 다 유학자이다. 한 분은 개혁론자였고 또 한 분은 보수주의자였다. 개혁이냐 보수냐 하는 것은 만난 시대에 따른 것이지 학문의 도(道)가 다른 것은 아니다.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떤가? 고양이의 색깔이 도대체 쥐를 잡는데 무슨 걸림돌이 될까?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은 성리(性理)의 실현이 목적이다. 성리를 실현하는데 붕당이 왜 존재할까? 어느 당이 집권하든 성리(性理)를 실현하지 못했으니, 그들에게 성리학은 하나의 이권쟁탈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며 국민주권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정치·행정의 목적은 헌법에 명시돼 있으니, 바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다. 좌·우와 보수·진보의 구분은 지금의 우리 시대에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정책이 필요하냐에 달린 문제이다.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하지 못하는 이념논쟁은 조선의 붕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이권쟁탈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행위의 이해타산을 암중에 뒀다면 어찌 ‘기해봉사’라는 개혁안에 목숨을 걸겠으며 성암이 어찌 왜적의 총칼에 태연자약하게 도의를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

아울러 오늘의 시대도 초려의 실천적 대의의 핵심인 변혁이 국정전반에 걸쳐 추진되어 헌법 제34조 1항이 명시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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