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47 충청도 갑부 김갑순(1)
1872년 공주서 빈농 아들로 출생
감영 심부름꾼… 관찰사 애첩 인연
세금 관리 일 맡으며 부동산 눈 떠
6곳 군수… 동학사 인근 치적 새겨
1011만평 소유… 충청권 제1 갑부
금강에 배다리 설치… 엄청난 화제

▲ 김갑순(金甲淳)은 충청지역에서 대표적인 입지적 인물이다. 사진은 동학사 인근에 남아 있는 공주군수 김갑순의 치적을 기념하는 글. 공주시 제공

[충청투데이] 김갑순(金甲淳)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충청도 갑부’라는 말이 붙는다. 충남의 갑부가 아니라 충청도 갑부다. 그야말로 대표적인 입지적 인물. 특히 그는 금수저가 아니라 아주 미천한 흙수저로 태어나 한 때 대전시가지 면적의 50% 상당을 찾이 할 만큼 부를 이룩했다. 지금도 옛 대전시 중심지의 토지대장을 떼면 김갑순이라는 이름이 안 나오는 경우가 거의 드물 정도다.

그는 1872년 5월 22일 공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아버지마저 어려서 세상을 떠나 그는 운명적으로 소년가장이 됐다. 하지만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아 본 일이 없는 데도 머리가 매우 영특하고 집념이 강했던 인물로 전해 오고 있다.

처음 그는 공주 감영의 감옥 심부름꾼으로 직장을 시작했다. (공주군청 잔심부름꾼이었다는 기록도 있음) 그런데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그와 의남매를 맺었던 당시 관찰사의 애첩이었다. 그 애첩은 김갑순을 감옥에서 관찰사가 집무하는 동헌으로 자리를 옳기는 역할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김갑순은 관찰사의 눈에 들도록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래서 관찰사는 1901년 둔토·역토·개간지의 실태파악과 여기에서 나오는 세금을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유지나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땅을 파악하고 그것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세금을 받는 것인데 이 때 그는 부동산에 대해 눈을 뜬것 같다. 욕심만 내면 얼마든지 눈먼 땅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구한말 정부의 모든 질서가 엉망일 때 그는 1902년부터 석성(부여)군수, 노성(논산)군수, 임천군수, 공주군수, 아산군수 등 10년 동안 여섯 곳의 군수를 역임할 정도로 그의 관문은 눈부셨다. 놀라울 정도의 인생역전이었다. 지금도 동학사 입구 매표소에서 50m쯤 가면 오른쪽 암벽에 공주군수 김갑순의 치적을 기념하는 글이 남아 있다. 그만큼 공주에서 오랜 동안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김갑순은 한·일합방이 되자 이듬해 1911년 아산군수를 끝으로 관직을 정리하고 사업가로 변신한다. 군수를 하면서 익힌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활용해 곳곳의 땅을 사들였다. 조선총독부가 공주, 논산, 부여 등지에 도로를 개설할 때 김갑순이 자신의 땅을 제공했다는 공로로 총독부 표창을 받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에 토지를 소유했는가를 알 수 있다.

1930년에 집계된 그의 부동산은 1011만평이나 됐고 대전시가지 면적이 57만8000평 시절, 그의 개인 소유 땅이 22만평 그러니까 대전의 땅 거의 50%를 차지했으니 충남·북 통털어 제1의 갑부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이런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6개 군의 군수와 국유지와 지방관속 소유 토지를 취급하면서 얻은 부동산 정보력이 큰 작용을 했으며 일찍이 시작한 승합차 운수사업이 자금력이 돼 줬기 때문이다.

당시 공주에서 조치원이나 서울, 대전을 가려면 금강을 건너야 했는데 다리가 없어 매우 불편을 겪었다. 김갑순은 일찍이 정조 임금이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놓은 것에 착안했다. 그래서 사비를 들여 30여척의 배를 폭 3m로 연결시켜 금강에 배다리를 놓아 승합차가 강을 건너 조치원도 가고 대전도 갈 수 있게 했다. 그 시절로서는 대단한 화제였다. 1922년에는 배다리에서 승합차가 물에 빠져 큰 사고가 났음에도 운수업은 날로 번창했다. (계속)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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