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 금산문화원장

예로부터 금산은 충절의 고장으로 불렸다. 산 좋고 물 맑아 청풍명월이라 불렸던 금산. 삼국시대부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중심에 있었다. 금강을 따라 전통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어 유교의 근본인 충·효·예가 계승·발전해 왔다.

금산의 유교는 불교가 국시였던 고려 때 성리학을 공부해 조선시대 국교러 정착하게 한 야은 길재 선생을 먼저 이야기 해야 한다. 고려말 1353년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난 야은은 부친 길원진이 금주지사(현 금산)로 부임할 때 부친을 따라 금산에서 살게 된다. 1363년 냉산 도리사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에게 논어·맹자를 배우고 이때 성리학을 접한다. 137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 사마감시에 합격을 한다. 그 해 이주신씨와 혼인을 하고 1386년 진사시 1388년 성균박사, 1389년 문하주서에 임명되나 사직을 한다.(부인 이주신씨의 묘소가 금산 제원면 닭실마을 앞산에 안치되어 있음)

고려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정몽주, 이색, 권근 문하에서 공부하고 제자로는 김숙자, 김굉필, 조광조가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기호학파인 본산인 연산을 중심으로 조광조-성수침-성흔-윤선거로 학맥이 이어지고 또 하나 율곡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또 하나의 학맥이 있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유계, 송준길과 더불어 동문수학을 하게 된다. 28세에 금산으로 은거를 한 윤선거가 금산 유학에 기초가 된다. 성리학과 예학을 연구한 그는 28세에 금산으로 은거를 한다. 1642년 마하산에 산천재를 짓고 예학을 연구한다. 스승으로 김집이 있고 권시(1604-1672) 송시열(1607-1680) 등이 있다.

이 10여년의 시기동안 유계와 가례원류를 편찬하고(1642년) 송시열·이유태·유계와 고례를(1644년) 연구했으며 서인의 대표적 인물 성흔과 정철의 연보를 편찬교정을(각 1648년, 1650년)했다.

1660년 기해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다툼으로 인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된다. 이때 금산으로 은거를 하면서 아들 명재, 윤증(1629-1714)를 데려온다. 아버지를 따라 금산에 온 명재는 14세 이전에는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14세 이후에는 23세가 되면서 연산의 김집에게 나가 배운 다음 유계에게 수학을 한다. 1657년 김집의 권유로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우며 사제의 정을 쌓는다.

1663년 공경과 삼사가 천거해 공직에 제수 받으나 모두 사양한다.

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 1680년에 박세채가 숙종에 상주하여 명재 윤증을 경연에 부르도록 청을 하나 사양을 한다.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청을 하나 나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첫째 스승인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고, 셋째 삼척(김석주, 김만기, 민경중)의 문로가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없기에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가진다.

이로 인해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하여 논쟁이 생긴다.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명재 윤증을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어 당파싸움의 원인이 된다.

1669년 부친 윤선거가 죽고 1673년 아버지 연보와 박세창이 쓴 행장을 가지고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묘지명을 부탁하게 된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의 일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며 소홀히 하게 된다. 이로부터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지게 된다.

명재 윤증이 죽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치열해진다.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윤증과 윤선거의 관직이 추탈 되지만 1722년에 다시 복직된다.

저서로는 명재유교, 명재의례 문답, 명재유서가 있다. 명재의 정치관과 사상은 스승 송시열과 달랐고 병자호란 이후 국제사회의 관계 숭명의지와 대청 실리 외교 문제가 정치 사상면에서 큰 갈등을 일으켰다.

급변하는 조선사회에 부응하는 학문과 사상체계를 세우려는 유교실학을 추구하고 이를 근거로 정치적 경륜을 제시하려고 한 것 같다.

우리는 명재 윤증과 그의 부친 윤선거가 금산에 정착하면서 만들었던 조선정치의 기본 틀과 조선 백성의 지켜야 할 가정의례를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뿌리는 연산에 김장생으로부터 내려와 금산에 유교가 정착되고 또 금산에 유교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만든 윤선거와 명재 윤증의 역할이 크다고 할 것이다.

반계 산천재 성곡, 용강, 석포재, 유곡서원과 많은 사우가 있다. 이곳에 배향된 선조들은 조선조에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유곡서원과 용강서원이 작은 흔적이나마 있고 나머지 서원은 흔적조차 없다.

금산에 있기까지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면서 남아있는 서원과 사우는 잘 보존을 하고 없어진 서원을 복원을 하여 금산의 기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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