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46 홍성의 김좌진 장군 생가
25㎞ 긴 계곡, 청산리 백운평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 슬금슬금…
오전 9시 독립군 발포 시작
삽시간에 日 200명 쓰러져

▲ 김좌진 장군 생가 전경. 홍성군 제공
▲ 김좌진 장군 영정. 홍성군 제공
▲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 홍성군 제공
▲ 백야 김좌진 장군 가지에 세워진 장군의 마지막 말씀을 새긴 비석. 홍성군 제공

청산리 백운평은 25㎞나 되는 긴 계곡인데다 좌우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 계곡에 1920년 10월 21일 이스가와가 이끄는 일본군이 들어섰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쫓기는 독립군은 위기를 맞았지만 그 위기는 기회가 됐다. 쫓기던 독립군은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서서히 다가오는 일본군을 조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적의 행렬이 눈앞에 오기를 기다리던 독립군은 오전 9시쯤 일제히 총구에 불을 뿜었다. 기관포에서도 불을 쏟아내자 계곡은 총소리로 가득 찼고 일본군은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펑펑 쓰러졌다. 뒤이어 본대가 합류했으나 삽시간에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일본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홍범도 장군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완로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벌인 전투에서 일본군 400명을 전멸시켰다.

10월 22일 새벽에는 천수동에 일본 기병대가 집결했다는 제보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1·2지대 병력이 이를 급습해 전멸시켰다. 이것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 사이에 벌어진 청산리 대첩이며 우리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통쾌한 승전보다. 일본군은 전사자 1200명 등 160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이끈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 출신. 그의 호 '백야' (白冶)를 따서 거리 이름도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번길.

여기에서 김좌진 장군은 1889년에 태어나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1905년까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99칸 큰 집에 많은 농토를 가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소년 가장이 됐다.

열다섯 살에 이르자 그는 노비 30여명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워 자유를 주었으며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어려운 혁명적 결단이었다. 그러고는 고향을 떠나 오직 조국독립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

191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으르 영입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무장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 사관연성소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마침내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독립군 298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한 달 후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는 바람에 청산리 영웅 김좌진 장군은 41세의 짧은 생을 만주 벌판에서 마쳐야 했다.

서울 골목가의 주먹세계를 제압하고 국회의원이 되어 유명한 '의사당 오물살포'사건을 일으킨 김두한은 그의 아들이다. 그래서 '장군의 아들' 이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홍성군은 장군의 생가터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전개 1991년 생가와 문간채를 복원했고 전시관도 마련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장군의 사당도 있어 참배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다음과 같은 어록비도 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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