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숭의사보존사업회 회장

성암(醒菴) 이철영 선생은 이미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때 태어나 망국의 과정을 하나하나 목도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유학자였다. 그 시기는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일던 급변의 시대로 어쩔 수 없는 서세동점 속에서 조선 역시도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던 때였다.

일생 선대의 뜻과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노력했던 선비였지만, 시대의 변혁과 국가누란의 위기에 혼신의 힘과 정신으로 외세에 맞섰던 것이다. 1909년 3월 일제가 민적법(民籍法)을 공표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했다. ‘치일국정부서 재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 再致日國政府書)’을 작성해 500년 종묘사직을 전복하고 3000리 강토를 유린해 만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해 일본 정부에 장서를 보냈다.

특히 1912년 8월 일제가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을 발표하고 사업에 착수하자 이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강력항의하고 거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선생의 일제 침략에 저항했던 여러 행적들 가운데는 무엇보다 신학(新學) 설치와 칭제건원(稱帝建元) 반대 그리고 독립청원서 서명 거부 등에서 선생의 자주독립과 민족정신의 발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

신학 설치의 반대는 1895년 갑오개혁 당시 학제개편 단행에 대해 기존의 인륜과 충효 교육 대신 일률적으로 강제한 실업교육과 자유·평등사상을 주입하는 신학교육의 주장에 인간성 회복과 미풍양속의 저해를 먼저 걱정했고, 칭제건원의 반대 또한 1876년 병자수호조약 내용처럼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는데 이는 개화파의 주장과 달리 일제에 감격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며, 황제의 칭호와 국호를 바꾸는 것 또한 일제의 속임수임을 간파하고 이는 병탄을 위한 수작이며 거기에 장단을 맞춰선 절대 안 된다고 강력 주장했다.

독립청원서 서명 거부 역시 당시 3·1운동에 기여하지 못한 일부 유림들이 ‘파리장서사건’을 계기로 자신들도 무엇인가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해 그 문제를 냉철히 지적하고 서구열강이 우리의 독립을 청원해 준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만이며 우리의 청원 자체를 수용할 리도 없겠지만 설령 수용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독립의 상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의 자주적 힘이 아니면 진정한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었다. 이는 최근 선생에 대한 학계의 평가와 재조명이 그것이고,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제100주년에 언론사의 관심과 연구, 조사가 바로 문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의 재평가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됐다. 이에 지역·지방대학(교) 문·사·철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심포지움과 포럼 등의 개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 탁월한 유학자로서 당시 학계의 화서(華西) 이항로, 매산(梅山) 홍직필 문하 간 명덕논쟁(明德論爭)과 남당(南塘) 한원진과 외암(巍巖) 이간으로부터 시작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명쾌하게 정리, 통합과 통섭의 정의를 내렸다. 명덕논쟁에 대해서는 명덕을 심(心)과 성(性)을 합친 것으로 규정하고 ‘흰 날줄과 검은 씨줄로 짠 베’에 비유해 명덕을 이(理)나 기(氣)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규정할 수 없다고 설명해 각계의 시비를 가리고 호락논쟁의 쟁점 또한 성삼양설(性三樣說)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정립해 양자를 모두 지양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100주기를 맞아 선생의 학덕과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며,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때 진정 사회와 국가를 위한 개인이며 학자로서의 자세와 우리가 지금 취해야 할 도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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