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며칠 후면 딸아이 유치원 재량 휴일이란다. 연휴로 이어지기에 이때를 틈타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아내에게 아이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이런 제안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최근 아내는 아이와 이런 저런 일로 옥신각신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고, 아이도 형제들 틈에 끼어 자주 짜증을 부리던 터라 기분 전환이 좀 필요하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도 마침 잘 됐다며 흔쾌히 허락해 줬다.

여행 일정을 짜는데 문득 일 년 전 딸아이와 놀이공원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한 가지 놀이기구, 그것도 비행기였는데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타고 또 타고를 반복했다. 줄을 서서 대기하는 시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섯 살이라 보호자가 꼭 동승해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같이 타야만 했다. 대기하려니 다리는 아프고, 타려니 위아래를 번갈아가며 빙빙 도는 탓에 어지럽기도 하고 속도 울렁거릴까 싶어 매번 걱정이었다.

이런 필자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아이는 신나서 타고 또 타고. 한참 지나 배고프다며 햄버거를 주문했다. 설상가상이었다. 속도 불편한데 햄버거라니. 그런데 허겁지겁 맛있게 먹으며 만족해하던 아이의 앳된 모습은 잊을 수 없다. 필자의 불편함도 잠시 어느덧 뉘엿뉘엿 산을 넘어 가는 해를 뒤로하고 즐겁고 행복한 공감을 간직한 채 돌아왔던 기억은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번 여행은 부산을 택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딸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고모 식구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차 여행이라면 더 좋아할 거라 여겼다. 동물원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바닷가 근처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를 즐기며 1박 후 다음날 기차를 타고 복귀하는 일정이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연휴를 며칠 앞두고, 마음이 한껏 들떠 있던 필자는 딸아이에게 여행 계획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빠가 좋은 소식 알려줄게. 이번 연휴에 아빠하고 부산에 놀러 가자, 어때?" 아이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필자는 자신 있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는 갑자기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무언가 생각하듯 하더니 필자에게 되물었다. "아빠하고만 가는 거야?" 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싫어."

신나서 뛰고 좋아라하며 아빠를 안아줄 줄 알았는데,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싫다고 대답하는 아이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필자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한몫 거들었다. "아빠랑 정말 안 갈 거야? 아빠랑 노는 거 좋아하잖아, 왜 안 가려고 해?"

그런데 그 다음 대답에 필자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아빠랑 가면 재미없어."

냉정한 거절 앞에 아빠랑 놀면 항상 즐거울 것이란 필자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다가도 아빠를 찾는 아이인데 한참을 생각해도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아빠랑 가면 왜 재미없는지 그 이유까지 캐물었다.

"아빠랑 가면 재미없는 게 아니라 엄마랑, 오빠랑 동생도 같이 가면 좋겠다는 거야."

그렇다. 아이는 아빠만 아닌 가족이 함께 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오해는 풀었지만 아이의 재미에 전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아빠로서의 한계가 느껴져 조금 섭섭했다. 하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길 뿐더러 함께 하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의 성숙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참 감사했다.

사실 무심코 지나쳤을 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잠시 눈에 보이지 않을 때면 어디에 있냐고, 과자를 살 때면 이건 오빠 것, 저건 동생 것하며 잘 챙겼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오빠, 동생과 함께 놀며 깔깔대던 시간들이 그 무엇보다 즐거웠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기에 아빠의 기대와 요구에 당당하게 싫다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이는 '함께'라는 행복을 이미 터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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