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은 우리나라 역사의 기구한 단면을 말해준다.

처음 호남선을 구상한 것은 엉뚱하게도 프랑스였다. 허약한 대한제국을 압박해 열강들이 한국에서 각종 이권을 챙겨 갈 때 프랑스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골라잡은 것이 호남선이었는데 처음 계획한 것은 대전~목포가 아니라 서울~목포였다.

이름도 경목선이었으며 제2안으로는 조치원~강경이었다. 그러자 우리 정부도 독자적으로 서울~목포 철도부설을 추진했으나 돈이 없어 주춤거리는 사이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들이 본국 정부에 조치원~목포 철도를 놓아야 한다며 강력한 건의를 올렸다. 그때만 해도 목포는 부산, 인천에 겨루는 큰 도시였고 일본 거류민들이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1973년 호남 철교. 사진=대전시 찰칵 홈페이지
1973년 호남 철교. 사진=대전시 찰칵 홈페이지

프랑스, 일본이 계속 호남선에 집착하자 우리 궁내부 고문 이윤용 등이 이들에 대한 맞대응으로 조치원~강경 또는 공주~목포만이라도 우리 손으로 철도를 놓겠다고 나섰으나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거기에다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을 내세워 철도부설권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우리는 약소국의 설움을 또 한 번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제적으로 호남선 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1910년 10월 제국회의(지금의 중의원)에서 조치원~목포로 호남선 철도부설비 1253만원을 승인받아 곧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회의에서 공사기간 11년은 너무 길어 7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다시 5년으로 줄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문제는 조치원에서 공주를 거쳐 목포로 가려면 금강 철교를 놓아야 하는데 여기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재빨리 눈치 챈 것은 대전에 있는 일본 거류민들이었다. 이때 대전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3891명으로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일본 거류민들은 조치원~목포 호남선을 대전~목포로 해줄 것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조치원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으나 그 세가 대전의 일본인들에 미치지 못했고, 경부선 부설 때처럼 인근 공주가 소극적이어서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호남선 출발점을 대전으로 할 것이냐, 조치원으로 할 것이냐, 그야 말로 양쪽 지역민들의 치열한 로비가 한동안 계속됐으나 일본 정부는 결국 대전의 손을 들어 줬다.

그러니까 프랑스가 추진할 때나 우리 정부가 추진할 때에도 호남선에 대전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이 처음 시작할 때도 대전은 설계 도면상에 없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도시에도 운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만약 그때 처음 계획대로 조치원~목포로 호남선이 정해졌으면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치원에 충남도청이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1914년 1월 11일 역사적인 호남선 개통이 이뤄졌고 대전은 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회덕에 있던 대전 군청도 시내 원동으로 옮겼다. 호남선이 개통되고서 1917년 조선총독부시절 발행된 '충남도 발전사'에 의하면 대전의 인구가 한국인 1813명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국인 보다 거의 3배가 많은 5080명이나 되었으니 호남선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고속도로 발달로 철도의 영향이 예전보다는 떨어 졌지만 '대전발 0시50분'의 호남선 첫 열차의 아련한 미련 만큼, 호남선이 충청인에게 주는 애정은 여전하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